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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Jun 03. 2024

하인츠의 딜레마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

    2023학년도 4학년 도덕 수업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면 좋을까. 도덕적인 규범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지루하다. 위대한 도덕 이론가들의 지식을 배우는 것은? 그건 4학년 학생들에게 너무 어렵고 가혹하다. 교육과정과 관련된 영화를 보여줘야 하나? 그러기에는 도덕 수업으로 할당된 시간이 부족하다. 4학년 2학기 도덕 수업을 어떻게 보냈는지 돌이켜 보았다. 통일을 향한 마음을 내면화하는 시간도 가졌고, 사회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각종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기르는 시간도 가졌다. 모두 알차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학생들이 내면화하면 좋을 가치‧덕목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 스스로 가치를 명료화하는 활동을 도덕 시간에 온전히 토론의 형태로 진행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통일에 관하여 배우긴 했지만, 수업 중 통일에 대한 찬반 토론이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그 부분은 6학년 정도 수준에서 풍성하게 다룰 수 있겠다. 게다가 통일과 같은 역사적 과제는 4학년 아이들 눈에 현실과 무관한 아득한 사건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학업, 연예인, 게임, 운동, 교우 관계 등 일상에서 생각할 것들이 차고 넘치며, 분단 상황에서도 우리 국민들이 잘 지낸다고 인식하는 학생들이 많다. 이 때문에 토론을 하더라도 교사가 자료 제시에 개입하고, 질문을 주도하지 않으면 토론이 일방적으로 흘러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론 수업은 학년과 관계없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학습 형태라고 생각한다. 아동의 인지발달 단계에 적합한 방식과 수준으로 토론을 진행하면, 학년에 따른 토론 수준의 깊이가 차이 날 뿐이지 어떤 학년이든 토론 수업은 이루어질 수 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교육 문화를 살펴보면, 어릴 적부터 가족들과 함께 토론하는 ‘하브루타’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원래 유대교 경전인 『탈무드』를 공부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나, 지금은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유대인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2%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차지한다. 게다가 세계 백만장자 중 20%가 유대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스티븐 스필버그는 ‘하브루타’를 자신의 성공 비결로 꼽았다.(1) 토론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지적 성취와 학습에 대한 흥미, 샘솟는 상상력과 표현력, 상대방에 대한 태도 등 토론이 자아를 긍정적으로 형성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이 성공의 비결로 꼽은 것이 아닐까. 도덕과에서 토론 수업이 적었던 점을 반성하며 마지막이라도 학생들과 함께 토론으로 도덕 수업을 엮어가기로 결심했다.

    방학을 앞둔 학기 말, 들뜬 학생들은 진도를 다 나가면 놀고 싶어 한다. 물론, 학급 교육과정에서 정해진 진도를 교사 재량으로 융통성 있게 조정할 수 있다. ‘교과서의 내용만 아니면 된다’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잽싸게 안내했다.

    “얘들아, 너희들 도덕 시간에 도덕성 검사할 거야.”

    “도덕성 검사요? 그게 뭐죠?”

    검사라는 말에 학생들의 귀가 번쩍 뜨였다. 학교에서 뭔가 검사한다고 하면, 아이들은 꼭 해야 하는 양 착각하며,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 반 학생들도 어떤 검사인지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질문했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돼. 수학의 식처럼 답이 떨어지지 않아. 그때 어떤 사고방식으로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지 고민하게 될 거야. 그런 상황을 미리 교실 속에서 만나보는 게 어떨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의 도덕성(morality)이 발달할 수 있어. 혹시 발달이란 말이 뭔지 설명할 수 있니?”

    “다음 단계로 가는 거요.”

    “맞아, 발달이란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거야. 계단이 열 칸 있는데, 첫째 계단에서 곧바로 열 번째 계단으로 한 번에 점프할 순 없지. 사람이 걷기 전에, 기어가는 단계와 걸음마 단계,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걸을 수가 없듯이 말이야. 도덕성이란 것도 발달의 단계가 있는 거야.”

    “아하!”

    아이들은 도덕성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도 단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온도는 온도계의 눈금을 통해 정도를 알 수 있고, 지능은 지능검사 수치를 통해 정도를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줍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친구를 위해 배식대에서 도와주는 일상의 행동뿐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처럼 자신의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남수단으로 건너가 일생을 의료 봉사로 가득 채운 선행도 아이들은 모두 뭉뚱그려 ‘착하다’라고 표현한다. 당연히 틀린 말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아가페(agape)적 사랑과 묵자의 겸애(兼愛), 공자의 인(仁)과 같은 높의 경지의 실천과 내가 친구에게 과자를 나눠 먹는 행동 모두 ‘착하다’는 말로 한 데 아우르기에는 성격과 정도에 있어 차이가 난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착하다’라는 가치를 좀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콜버그라는 굉장히 유명한 교육심리학자가 있어. 그분이 도덕성의 발달 단계를 크게 세 가지 수준으로 나누었고, 세 가지 수준을 다시 6단계로 나누었지. 그 학자가 나눈 단계에 따라서 현재의 내 도덕성은 어떤 단계인지 알아보려는 거야. 다만, 너희들의 검사 결과는 공개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중요한 건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사고를 확장하는 데 있으니까. 그럼 화면 보세요!”                    


    어느 부인이 암으로 죽어 가고 있다. 그런데 부인을 살릴 수 있는 약을 그 마을의 약제사가 발명하였다. 비록 그 약을 만드는 데 많은 비용이 들긴 하였지만, 그 약제사는 그 제조비보다 열 배나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였다. 그 부인의 남편인 하인츠는 그 약값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반값밖에 구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는 약제사를 찾아가 아내가 죽어 가고 있으니 먼저 약을 주면 꼭 후에 약값을 갚겠다고 사정하였지만, 그 약제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약제사는 “나도 오랜 세월 힘들여 이 약을 발명하였으니 돈을 벌어야 되겠소.”라고 말했다. 결국 하인츠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방을 부수고 들어가 약을 훔쳤다. (2)


  질문1: 남편 하인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질문2: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교육학 서적의 내용을 각색하여 파워포인트로 요약 정리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이해도를 고려하여 약제사라는 말보다 약사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약의 가격은 2,000달러로 정했다. 나는 조선 시대 전기수로 빙의한 것처럼 실감 나게 화면에 띄운 이야기를 읽어 주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과도한 속칭 ‘오버 액션(over action)’에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장된 말투가 때론 내용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내가 이야기 사이 사이에, 놀란 표정과 말투로 ‘어떻게 이런 일이!’를 연신 외칠 때마다, 아이들도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여기저기서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연거푸 터지는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잠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돌판 위에 익고 있는 삼겹살을 보며 입맛을 다시듯이, 아이들은 뭔가 터지려는 말을 꾹 참았다.

    “한 번에 우르르 쾅쾅! 말해버리면, 수업이 진행되지 않겠지? 우선 우리 반 학생들의 생각을 조사해 보자. 하인츠가 약을 훔치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세요. 즉, 훔쳐도 된다는 뜻입니다. 배우자가 없어서 잘 공감이 안 간다면, 가족 중 한 명이 암에 걸린 상황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우리 반 학생 아홉 명 중에서 일곱 명이 손을 들었다. 나머지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확인 질문을 했다.

    “그러면 훔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손들어볼까?”

    나머지 두 명이 손을 들었다. 기타 의견이나 모르겠다는 의견은 없었다. 예상대로 훔쳐도 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확연히 갈린 의견 속에서 딜레마 상황을 심도 있게 이끌어 가기 위한 질문을 했다.

    “그러면, 하인츠의 도둑질은 정당하다. 즉, 훔쳐도 된다고 한 친구들에게 물어볼게. (한 학생을 지목하며) 도둑질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나요?”

    “당연하죠. 그래도 훔칠 거에요.”

    “네, 좋아요. 그러면 나쁜 일이란 걸 알면서도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래도 안 돼요. 왜냐면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절대로 안 돼요.”

    순이는 배우자란 자리를 엄마로 대체했나 보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엄마란 존재는 세상 전부일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물어보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네요?”

    “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가족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나쁜 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오,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생각이네요. 좋은 의견이야. 혹시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친구 중에서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상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상현이는 평소 문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좋은 버릇을 갖고 있다.

    “선생님!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2,000달러면 어느 정도인가요? 큰돈인가요?”

    “1달러는 대략 1,200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2,000 곱하기 1,200.”

    “그러면 이백육십만 원이란 건데, 그 정도 돈은 큰돈이 아니잖아요? 이 이야기는 따라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합당한 상현이의 지적이었다. 물론 논제의 본질은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2,000달러가 큰돈인지 적은 돈인지의 판단 여부와 달리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상현이의 이의 제기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핵심이 돈이 아니므로 약간의 눈속임을 했다.

    “오, 정말 이백육십만 원 정도밖에 안 되네. 좋은 질문이야. 그런데 상현아 지금 이백육십만 원은 적은 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옛날의 이백육십만 원은 적은 돈일까? 콜버그가 하인츠 딜레마를 발표한 때가 선생님이 알기론 굉장히 오래전인데, 그 당시 이백육십만 원은 지금의 시세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 선생님이 어렸을 때 새우깡 가격이 100원이었어. 지금은 새우깡이 천오백 원 정도 하지? 그러면 몇 배가 오른 거야? 열다섯 배나 올랐지? 그러면 이백육십만 원 곱하기 15를 하면 얼마일까?”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일견 허점이 있는 논리지만, 아이들의 귀에는 그럴싸하게 들렸나 보다. 상현이와 아이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계속하여 질문을 이어나갔다.

    “훔쳐도 된다는 친구들에게 다시 질문할게.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 들어봤지? 상대방과 처지를 바꾸어보자는 뜻이야. 이번에는 약사의 처지에서 생각해 봐. 모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보는 거야.”

    약을 훔쳐도 된다는 아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약사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야. 삼시 세끼 중 한 끼만 제대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지.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모님은 편찮으시고, 형제들도 많아서 누나가 어린 나이 때부터 돈을 벌며 가족들을 돌봤어. 어느 날 약사는 공원을 지나가다 맛있는 솜사탕을 먹고 있는 또래 친구를 보고, 자신의 텅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지. 이때 약사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어.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거야. 지독하게 가난한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했어. 그 뒤로 남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섭게 공부하기 시작했지. 결국 고생 끝에 약대에 진학하게 된 거야. 하지만 여전히 대학교 학비가 만만치 않아 누나의 지원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어. 본인이 과외를 해서 자기가 쓸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었지만, 비싼 등록금까지는 댈 수는 없었거든. 대학을 들어가더라도 또 다른 고생을 한 거야. 그렇게 6년간 열심히 힘들게 공부하며 졸업했지만, 졸업하고도 약국을 차리기 위해 은행에 돈을 빌려야 했어. 생활이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노력하면 미래는 더욱 나아진다는 희망으로 현실의 고통을 한 고비씩 넘었어. 악착같이 버티면서 약사로서의 사명감으로 암 치료제 연구를 했는데, 우연히 암세포가 더는 번지지 않도록 억제하는 물질을 화학적으로 만들어낸 거야. 암 치료제를 만든 거지. 이제 더는 고생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물심양면 뒷바라지한 누나에게 진 빚을 갚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생들도 먹여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너무 기뻤어. 그런데 말이지, 약사가 살았던 때는 자기가 개발한 약의 값어치를 개발자가 정할 수 있었어. 가격이 정해진 게 아니라, 부르는 사람 마음이었던 거지. 자, 이제 눈을 떠도 돼.”

    “……”

    어느새 아이들의 표정에 불편함이 드러났다.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영화 대부분이 선악의 명확한 구도를 보여주었다. 그런 영화는 당연히 권선징악을 보여주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인지 빌런(villain)이 어떤 경험으로 악인이 되었는지, 사연을 구구절절히 보여주는 영화가 등장했다. 시청자는 빌런의 악한 행동을 공감하고,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빌런을 악한(惡漢)으로 만든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배트맨 시리즈 중 ‘다크 나이트’를 보면 선(善)의 편에 서서 시민들의 평화를 지켜온 배트맨에게 조커는 ‘너도 나와 같은 괴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배트맨의 존재가 자신을 완벽하게 만든다(You complete me.)고 한다. 어릴 때는 선과 악이 뚜렷한 세상을 경험한다. 미성년의 시기는 미성숙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고 익히며 사회화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하인츠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일상에서 겪을 수 있다. 딜레마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가치끼리 상충하는 상황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경험이지만, 우리 반 아이들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 왜 이렇게 문제를 꼬아서 내요?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잖아요.”

    “선생님! 왜 우리 쪽만 질문해요? 다른 약을 훔치면 안 된다는 쪽도 어서 질문해 주세요.”

    “참! 빠진 내용이 있어! 약을 훔칠 경우, 하인츠는 충격으로 기절할지도 몰라.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거든.”

    “아~ 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진영(陣營)으로 편이 갈려 있나 보다. 선생님을 무기 삼아 상대방 진영을 공격하길 원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 편과 네 편으로 진영을 갈라 싸우는 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얼마든지 도중에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깨우칠 필요가 있었다.

    “훔치면 안 된다는 친구들에게도 할 질문이 많아요. 그런데 그 전에! 이 토론은 두 편으로 갈라서 싸우기 위한 자리는 아니야. 물론 그런 성격의 토론도 있어.”

    “어떤 토론이요?”

    “혹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토론 본 적 있어? 후보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토론으로 서로를 철저히 검증하는 걸 볼 수 있어. 그런데 토론 중 갑자기 어느 한 사람이 ‘김 후보자님의 생각을 듣고 보니, 저보다 더 훌륭하신 분이라 느껴지네요. 이번 선거는 제가 사퇴하겠습니다. 우리 지역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진 않잖니?”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모처럼 웃음이 터졌다.

    “그럼 돈을 훔치면 안 된다는 쪽의 의견을 들어 볼까?”

    도현이가 기다렸다는 듯 번쩍 손을 들었다.

    “당연히 도둑질은 나쁜 거니까요. 법을 어기는 게 옳은 일은 아니잖아요.”

    “맞아요. 법을 어기면 당연히 안 되죠. 절도죄에 해당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어기고 싶지 않나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건가요?”

    “딱한 사연을 신문이나 방송으로 알리고, 모금 운동을 할 거예요.”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암에 걸린 환자에게 하루하루는 정말 큰 시간입니다. 돈을 모으는 과 정에서도 점점 환자의 암세포는 번져가고 있어요. 모금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죠. 지금 당장 약을 훔치면 환자를 살릴 확률이 높을 거야. 그리고 하인츠와 입장이 똑같이 암으로 고역을 치르는 아내를 살리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2,000달러가 있어. 약은 하나밖에 없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하나 남은 약을 마저 사려 하고 있어! 약을 제조하는 데는 시간이 꽤 들어. 왜냐하면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만 산다는 희귀한 식물을 재료로 써야 하거든. 그래도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선생님, 왜 자꾸 문제를 더 꼬아요. 너무해요.”

    너무하다고 말한 도현이는 나중에 반대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결국 우리 반 학생 모두 약을 훔쳐도 된다는 입장이 되었다. 배움이란 일생동안 알고 있었던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의 명언이다. 이 말이야말로, 배움의 성격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법과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법과 규칙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위의 가치들이 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다시 법과 규칙을 쳐다본다면 그것들이 달리 보일 것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 완벽‧무결한 실정법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제정한 규율이 역사적으로 완벽한 적이 있던가. 법과 규칙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인종 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자행한 ‘수권법’도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각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법들을 사라지게 하는 동력이다.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주면서, 지금껏 서로 나누었던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검사라는 말로 표면을 감싸버렸지만, 검사가 가지는 일반적 성격을 떠나, 이 수업에서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더 소중하다.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우리 반 학생들이 작성한 답안을 살펴보자. 첫 번째 질문, ‘약을 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답은 모두 ‘네’. 두 번째 질문,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이고, 이에 대한 답은 모두 다르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 두 번째 답안을 맞춤법을 약간 수정하여 소개한다.                    

1. 의사의 사정도 이해하지만, 내 가족이 더 많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2. 약사도 가족만 생각하는데, 나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이 없다. 따라서 나도 가족을 생각해서 훔칠 수 있다.

3. 약사는 그 약을 개발하려고 죽도록 고생했다지만, 사람마다 죽도록 고생하는 일이 있고, 나도 엄마가 죽으면 죽도록 슬플 것이다.

4. 약을 만드는 사람이 약값을 정하는 게 당연한 시대라지만, 열 배까지 올리는 건 좀 아니다.

5. 훔친다면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고, 감옥은 몇 년 또는 몇 개월만 있으면 집에 올 수 있다.

6. 사람은 살면서 죽도록 고생하는 일이 하나씩은 있다.

7. 약사의 사정도 이해하지만, 내 가족이 더 많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8. 가족을 살리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훔쳐도 된다.

9. 일단 훔치고 나중에 배상해 주면 된다.

10. 약사가 내 입장을 역지사지한다면, 약사도 훔칠 것이다.(약사도 내 상황이라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11. 돈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2. 가족을 잃은 고통은 무엇보다 아프기 때문이다.

13. 가족을 살리고 싶다. 안 살리면 후회가 클 것 같다.

14. 불법을 저질러도 생명은 살려야 한다.


    아이들이 작성한 답안을 콜버그의 이론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선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을 살펴보면서 아이들의 답안을 하나하나 해석해 보자. 콜버그는 도덕성 발달을 3수준 6단계로 나누었다. 3수준이란 말은 전(前)인습적 수준, 인습적 수준, 후(後)인습적 수준으로 나눈 것이다. 여기서 인습적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예전의 풍습, 습관, 예절 따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습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nventional’은 ‘관습적인’, ‘평범한’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면, 살아가면서 마땅히 따라야 할 상식이 되어버린 것들, 예를 들자면 법, 규범, 규칙 등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전인습적 수준(pre-conventional level)에 머무른 사람은 자신의 도덕성 발달 수준이 전통적인 법과 규범, 질서를 기준으로 도덕적 사고를 하기 어렵고, 도덕적 판단의 준거를 개인적인 욕구나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에 관련짓는다. 즉, 개인의 편익과 호불호만 중시하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 사고, 등가 교환식의 대가성 사고가 드러난다. 인습적 수준(conventional level)에 머무른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빚어진 사회지향적 가치 기준으로 사고한다. 후인습적 수준(post-conventional level)에 해당하는 사람은 법과 규범을 넘어 사고할 수 있다. 법과 규범이란 인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산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영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적법절차에 따라 결정된 법은 존중되는 것이 마땅하나, 그 자체가 완벽한 결과물이자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보편적인 이상과 가치에 비추어 부당한 법은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따라서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선택한 도덕 원리에 따라서 사고한다.

    콜버그는 3수준을 6단계로 더욱 세분화하여 나타냈다. 1단계는 벌과 복종의 지향(벌의 회피 및 복종 중시)으로, 벌을 받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단계이다. 따라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규칙을 지킨다. 2단계는 도구적 지향(욕구 충족과 거래 중시)으로, 다른 사람과 나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상황은 인지하지만, 자신의 욕구 충족을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단계이다. 3단계는 조화로운 대인관계 지향(평판 중시)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려지는 평판을 고려하여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단계이다. 4단계는 법과 질서 지향(법과 질서 중시)으로,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무를 다하는 단계이다. 5단계는 사회계약 정신 지향(사회계약 중시), 6단계는 보편적 도덕 원리 지향(보편적 윤리 중시)으로, 어른이라도 진정한 의미로 이 두 단계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5단계는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공리주의와 가치 기준의 일반화를 추구하며, 6단계는 스스로 선택한 도덕 원리, 양심의 결단에 따른다. 5단계와 6단계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도덕적 상황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스스로 선택한 도덕 원리라고 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3)

    우리 반 학생들의 답안으로 돌아가자. 우선 1~3번 답안은 전인습적 수준에 해당하며, 타인의 것보다 내 것을 더욱 소중히 여겨서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2단계에 해당한다. 특히 2번 답안은 ‘당신도 당신의 가족만 생각하듯이, 나도 내 가족만 생각하겠다.’는 ‘give and take’와 같은 등가교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4번 답안, ‘좀 아니다.’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지만, 열 배란 범위가 사회적 통념상 너무하다는 걸 말하는 듯하다. 이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만일 열 배가 아니라 다섯 배로 약값을 정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좀 아니다’는 데에 부연 설명이 있었다면 단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5번 역시 2단계에 머문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감옥에 가는 고통과 아내를 살리는 이익을 비교하여 이 정도면 감옥에 가는 게 나은 일이란 계산적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6번 답안을 보면 ‘나도 너처럼 고생했다.’는 생각은 서로의 고통을 비교한 것이다. 당신이 고생한 세월 때문에 무자비하게 약값을 열 배로 올렸다면, 나 역시 정신적 고통에 처해 있으니 당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아내를 잃지 않겠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사고가 깔려 있어 2단계에 해당한다. 7~9번 답안 역시, 자신의 욕구 충족을 기준 삼은 생각으로 2단계에 해당한다. 즉, 타인의 입장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10번 답안은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지 판단을 내리기 애매하다. 만약 인간의 보편적인 생명권에 기초하여 이런 생각을 했다면 굉장히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더라도 약사의 선택과 내 선택이 같지 않을 수 있다. 왜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므로 단계를 판단하기 어렵다. 11번 답안을 얼핏 보면, ‘돈’이란 말이 왜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인츠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돈의 가치와 생명의 가치 대립’이 아니라, ‘준법의 가치와 생명의 가치 대립’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이 학생은 약사의 입장에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돈을 벌어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걸 추구해야 한다는 윤리적 문제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학생은 2단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12번과 13번 역시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강하다. 2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 14번 답안은 4학년 학생의 답안이란 걸 내가 모른 채, 부연 설명만 충분했더라면, 가장 고상한 단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제자들은 만장일치로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약을 훔치는 선택을 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2단계에 해당하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 하인츠는 도덕성 발달과 특정 연령을 관련지어 연구했다. 8~11세의 아이들이 2단계 수준에 속한다고 한다. 콜버그 이론은 도덕성 발달 단계를 제시함으로써, 현재 자신의 도덕적 수준에 대하여 반성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고, 도덕적 딜레마를 살펴봄으로써, 도덕적 추론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렇지만 콜버그의 이론도 한계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한계점은 도덕적 발달 단계와 실제의 도덕적 행동 수준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도덕성을 인지적 측면에만 치중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시행되는 도덕과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모든 학생이 실제로 도덕적 삶을 살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같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대학 입시 면접에서 면접관이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응시자에게 제시했다. 면접관이 듣기에 마음에 들만한 기준에 근거하여 답변한다면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응시자는 자신의 입장과 관계 없이 면접 기출문제를 분석하여 면접관이 원하는 답변에 대한 틀을 만들어 준비할 것이고, 두말할 필요 없이 관련 지식을 학습하고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말하는 연습도 열심히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면접 문제에서 제시된 상황을 실제로 마주친다면 어떨까. 대답과 실제 행동이 다를지도 모른다. 반면, 평소 모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고상한 인품이 성인군자(聖人君子)가 있다고 가정하자. 다만 그 사람은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속도가 느리다. 안타깝게도 언변 또한 부족하고 말투도 어눌하다. 게다가 복잡한 문제 앞에서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다. 면접에서 제시된 딜레마 질문에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성인군자의 도덕성 점수는 낮게 측정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성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그것에 준하는 행동으로서 관습, 풍습, 선악의 표준을 말한다.(4) 많은 사람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성이란 아마 이런 뜻으로 파악될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장 피아제와 같은 학자는 도덕성의 발달을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이라고 보았다.(5) 도덕성을 일종의 상황 판단력으로 보게 되면, 개인의 성품(도덕성의 정의적 측면 - 올바른 일을 행하려는 마음가짐과 태도로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성을 말한다.)과 도덕성 발달 단계 사이의 괴리가 생긴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인지적으로 성숙할지는 몰라도, 생명을 불쌍히 여기고,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공감의 자세는 아이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즉, 사람의 순간적인 판단력과 답을 통해서 도덕성을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머릿속으로 도덕적 행동을 분별하는 것이 행동에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도덕적 지식과 도덕적 추론 능력이 도덕적 행동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행일치(知行一致)란 말을 살펴보면, 이는 자신이 아는 것[知]을 그대로 실천[行]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오줌을 싸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오줌이 마렵다. 참고 가면 100m 정도 거리의 공공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수 있다. 요의(尿意)를 참으며 100m를 걷는 게 가능하나, 저 멀리까지 참고 가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적당한 골목 한구석에 오줌을 싼다. 이 행동은 남이야 악취를 맡든 신경 쓰지 않고 소변 후 느끼는 본인의 시원함만 충족하려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지행일치가 되지 않는 삶이다. 지행일치란 말은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강조한 개념이다. 먼저 어떤 일을 행(行)하기 이전에 알아야 한다[知]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의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알지 못한다면 행동하기 어렵다. 앎은 실천의 수단이고, 실천은 앎의 목적이 되는 관계 속에서 앎과 실천은 명확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 생각과 달리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 왕양명은 앎과 행함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상방뇨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결국 골목에 오줌을 쌌다. 이는 왕양명의 입장에서는 참된 앎을 알지 못한 행동이라 해석할 수 있다. 진정한 앎은 ‘남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가치를 실천으로 매개할 수 있는 앎이다. 실천 속에 이미 앎이 자리 잡고 있기에, 실천을 함으로써 앎은 실천 속에서 완성된다. 즉, 앎과 실천이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知行合一] 나는 학문이 부족하여 성리학과 양명학 중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 것인지 가릴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주장 모두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선지후행이든, 지행합일이든 자신의 도덕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중학생 시절 노인요양시설에 봉사하러 간 적이 있다. 봉사활동 시간을 별도로 채워야 해서 간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어머니께서 봉사활동 자리를 알아봐 주셔서 떠밀려 가게 되었다. 봉사활동 자체가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좋은 일이란 건 단편적으로만 느끼고 있었다. 오로지 그 시기의 나는 게임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게임을 할 시간에 봉사활동이라니! 나는 내게 주어진 현실을 귀찮게 여겼다. 노인요양시설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들이 따갑게 찌르며 맞이했다. 큰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 따라 점점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당일 목표한 봉사 시간 4시간이 흘러간 뒤,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청소하는 일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목욕을 보조하고, 말동무가 되어 주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활동 과정에서 더러운 오물을 치워서 속이 메슥메슥하기도 했고, 노인들께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셔서 짜증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도망갈 틈 없이 악취를 맡아야 한다는 현실이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고,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도 재밌었다. 꼭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어르신들의 시선과 몸짓에서 고마워하는 마음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분들에게 봉사했다는 자체가 어느새 뿌듯함과 보람으로 다가왔다. 습관의 뜰을 지나야만 이성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 피터스(Peters)의 교육적 금언이 떠오른다. 따라서 일단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도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실천은 앎의 완성이란 주장도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계점을 언급했음에도, 여전히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은 도덕과 교육에 있어서 학문적으로 중요한 이론이라 생각한다. 딜레마 상황을 나누면서 학생들마다 논리 전개 방식이 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또래의 영향을 어릴수록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을 때, 친구들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서로 활발하게 접하면서 자신의 사고를 돌이켜 점검하고 성찰하며 도덕성을 키워갈 수 있다. 선지후행이면 어떻고, 지행합일이면 어떤가. 일단은 머릿속으로 알고 사고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지적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학생 주도성 프로젝트’ 형태로 수업을 설계하고 실천함으로써 앎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도덕 교과는 지·정·행의 측면을 고루 반영하여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교육의 실현은 교사에게 달려 있다. 교사가 실천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실천만 강요한다면, 선생님의 말씀은 새들의 편한 잠을 방해하는 공허한 소음과도 같다. 교실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우라는 말보다 묵묵히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더 강한 울림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해 동안 제자들에게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였는지 반성해 본다. 일이 많다는 이유로 점심시간에 함께 축구 경기를 하기로 한 약속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쉽게 깼던가.



(1) 이채경 학생 기자가 쓴 생글생글 787호에 게재된 신문 기사 ‘[생글기자 코너] 생각의 폭 넓혀주는 유대인의 '하브루타 학습법'’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2023. 2. 6. 생글생글 누리집 게재)

(2) 『쉽게 풀어쓴 교육학』(이병승, 우영효, 배제현 공저, 학지사)의 165쪽을 인용하였습니다.

(3)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은 『쉽게 풀어쓴 교육학』(이병승, 우영효, 배제현 공저, 학지사)과 나무위키 ‘하인츠 딜레마’, 네이버 지식백과 ‘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심리편(저자 이동귀)’ 웹사이트 ‘하인츠 딜레마 총정리’(https://sunday12473.tistory.com/73)를 참고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하고, 이론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4) 네이버 지식백과 『상담학 사전』(김춘경, 이윤주, 정종진 저, 2016, 학지사)의 ‘도덕성’을 참고하였습니다.

(5)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의 ‘도덕성’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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