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슬

by 카이

쨍그르르르. 또 유리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아니, 유리구슬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게 굴러가는 소리가 평범한 가정집에서 날 리가! 그르르르르. 또다. 이 소리는 아주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어느 날은 아침에, 어느 날은 점심 때, 어느 날은 꿈결에 들려온다. 죽어라 공부해온 영어에는 귀가 그리도 안 트이더니, 아주 슬프게도 일제히 들려오는 그 맑은 소리에 내 귀가 100퍼센트 트이고 말았다. 층간소음에서는 ’귀가 트인다‘는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한번 알아듣기 시작하면, 영원히 들리는 그 소리들. 어쩌면 그 바람에 내 꿈속에서조차 그 소리가 나를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들려온 소리다. 내가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 이사 온 지는 딱 2년이 지났다. 그사이 이렇게 알 수 없는 소리에 시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아주 운이 좋아서, 조용하고 차분하고 개념 있는 주민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렸다. 내게는 온갖 층간소음과 벽간소음의 끝판왕들이 다녀갔다. 아, 왔다가 가지 않은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처음엔 불청객이었지만 어느새 나의 벗이 되어버린 손님들. 나는 그저 그 소리에 대해 분석하고 해체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신 승리를 해왔을 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리 아파트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는 편이 낫겠다. 이 아파트는 거의 30년 전에 지어졌다. 누군가 그랬다. 분명 옛날 아파트가 더 튼튼하게 지어졌고, 층간소음에서 더 자유롭다고. 누구야, 대체! 그런 개소리를 한 게, 으으으...!!! 진정하자. 나는 지금 다소 예민할 뿐이다. 그래, 조금 예민한 상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 아파트는 요즘 아파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복도식 아파트다. 내 집은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은 아니다, 나는 전세도 아닌, 월세 신세니까. 그렇지만 편의상 ‘내 집’으로 말하기로 하자.)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작은 거실 하나,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감이 전혀 없는 주방으로 구성된 20평짜리 아파트다. 내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복도로 진입하자마자 있다. 그래서 내 집 거실 옆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공용 공간이고, 내 집 안방은 옆집 거실과 바로 맞닿아 있게 되는 구조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밤 열두 시, 내가 자려고 누운 침대 머리맡 벽 쪽에서 유난히도 선명하고 높은 음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깔깔’, 이 얼마나 정석적인 웃음소리인가. 아주 신이 난 건지, 랩하듯이 쏟아내는 여자의 조잘거림. 게다가 쓸데없이 목소리가 맑다. 분명 마음속으로 욕을 하려고 했는데, 그 여자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진심 어린 웃음을 담고 있어서, 마치 방송인 장도연의 우아한 개그에 어느 순간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옆집 ‘깔깔이’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내가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불러낸 짜증은, 이내, ‘시끄럽게 화를 내며 싸우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하는 소리라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긍정적 요소를 포함한 벽간 소음이라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한다. 아, 심지어 주말에는 새벽 4~5시까지 그 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옆집 깔깔이가 평일에는 일찍 주무셔서...’


물론 조금 더 억지스러운 경우도 있다. 우리 윗집에는 얼마 전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매일 새벽 5시쯤 정말 교과서 같은 소리로 “응애응애” 하고 운다. 두마디씩 끊어서 우는데, 인간의 본능적 소리들이 이토록 닮아 있다는 사실에 살짝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나는 그 소리를 내 아이폰 알람소리보다 더 잘 포착해내는 귀를 지녔다. 그 후로 나는 아기닭의 새벽을 여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아침형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 이 소리도 처음엔 무척 짜증났지만, 단 며칠 만에 나는 아기닭에게 내 맘대로 ‘윗집 아리’라는 애칭을 지어준 뒤, 응애응애 할 때마다 ‘아이코, 우리 윗집 아리가 또 정확히 새벽 5시에 일어났네! 기특해! 기특해!’ 하면서 이제는 새벽에 아리의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잠에서 깰 정도로 익숙해지고 말았다. 나는 알람 시계도 없이, 한때 유행했던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는 몇만 짹짹이 중 한 명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왕이면 트렌드에 맞춰서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면 더 좋았을 터. 혼자 시대에 뒤쳐져 외로이 미라클 모닝 중이다.


‘쓰윽쓰윽’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처음에는 아랫집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일까 생각했다. 쓰윽쓰으으윽. 하지만 누가 청소기를 시도 때도 없이 돌린단 말인가. 아, 어쩌면 결벽증 환자가 사는지도 모르겠네. 나는 한동안 쓰윽쓰윽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동작을 멈추고 그 소리에 오롯이 귀 기울였다. 무슨 소리일까. 정확히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지? 대체, 대체, 대체, 무슨 소리... 알 수 없었다. 쓰윽쓰윽. 난 타고나길 알지 못하는 걸 참지 못한다. 쓰윽.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난, 어느 날 결심했다. 쓰으으으윽. 직접 알아보기로! 내가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거의 없는 애매한 오후 시간, 쓰윽쓰윽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청소기인지, 내가 모르는 요상한 기계 소린인지, 난 정말 궁금해서 곧장 계단을 이용해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바로 아랫집인지, 한 층 더 밑에 있는 아랫집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랫집 복도로 들어선 순간,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를 마징가처럼 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우사인 볼트처럼 빠르게 캣휠을 돌리고 있었다. 고양이 다리가 정말 톰과 제리처럼 보이 않을 정도로 날쌔게 움직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휠이 돌아갈 때마다 쓰윽쓰윽 하는 일정한 소리가 났다. ‘아, 우리 아랫집 고양이님이 캣휠을 타는 소리였구나.‘ 휠이 돌아가는 모습과 씩씩하게 들려오는 쓰윽쓰윽 하는 장단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집 고양이님 애칭까지 지어주고 말았다. ‘볼트’ 단순한 작명이지만 기억하기 쉬우니까. 옆집 깔깔이님, 윗집 아리님, 아랫집 볼트님까지 이렇게 나는 직접적인 교류는 전혀 하지 않는 이웃들을 벗 삼아 내 일상을 살게 되었다. 게다가 셋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겠지만, 아주 아주 가끔, 절묘한 타이밍에, 이 셋의 오케스트라가 열릴 때도 있다. 깔깔깔깔, 응애응애, 쓰윽쓰윽...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혼자 내적 친밀감으로, 이 합주에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쨍글쨍글, 쨍그르르. 아, 또다! 또 유리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와... 10년 전, 살짝 인기를 끌었던 노랫말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유리구슬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호그와트 마법학교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다. 그리고 조금 더 답답한 점은, 윗집 소리도 아니고, 옆집 소리도 아니고, 아랫집 소리도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히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나를 가장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르르르릉쨍. 가끔씩 소리를 반대로 재생한 것처럼 꼬여서 들려올 때도 있다. 누군가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자연의 소리 같은 걸 녹음해서 음악을 만들려는 걸까? 그렇다면 유리구슬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의 실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일주일간,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주변에서 난 소리라곤, 깔깔이의 웃음소리, 아리의 울음소리, 볼트의 캣휠소리, 거기에 유리구슬 소리가 전부였다. 나는 또다시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보았다. 어쩌면, 이 머글들의 아파트에, 9와 4분의 3 정거장을 이용하는 마법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잠시 선을 넘은 생각이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분석해보자. 유리구슬, 어릴 적 갖고 놀던 눈깔사탕을 닮은 그 유리구슬 소리인가. 누가 향수병에 걸려서 쿠팡으로 유리구슬 한 묶음을 주문한 다음, 틈날 때마다 혼자서 구슬치기를 하는 걸까. 아, 아니지! 어쩌면 21세기의 어린이들도 뉴트로 게임이라며 유리구슬로 구슬치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누가 어떻게 내는 소리인지 모르더라도, 이게 유리구슬 소리인지 아닌지부터 알고 싶었다. 쿠팡에서 24개 세트 ‘추억의 왕 구슬치기 놀이’라고 광고 문구가 걸려 있는 제품을 무려 5800원에 구입했다. 놀랍게도 로켓배송도 아닌데 배송료가 포함된 가격이었다. 고물가 시대에 이런 착한 가격이라니, 고맙다. 다음 날, 나는 유리구슬을 배송받았다. 3배 가격이 되는 오로라빛 유리구슬도 팔았는데 살짝 탐이 났다. 그치만, 월세살이 프리랜서가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눈깔사탕을 닮은 유리구슬 꺼내 나 홀로 구슬치기를 해보았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유리구슬을 무척 좋아했다.) 쨍그르르르. 같은 소리가 났을까. 전혀 아니다. 쨍, 쨍, 쨍.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순간에만 맑고 단순하고, 짧은 소리로 ‘쨍’ 했을 뿐이다. 그르르르, 하는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 구슬치기 가설은 틀린 것이다. 소리가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그 쨍 하는 소리는 조금 닮아 있었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쨍그르르르. 내 실험의 실패를 격려하듯, 또다시 유리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키백과처럼 집단 지성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집에 있는 옷들 중 가장 무난한 올리브색 후드티와 약간 낡아서 무릎이 해진 청바지를 챙겨 입었다. 혹시나 추울까 봐 패딩 조끼도 껴입었다. 거울을 봤다. 아주 평범해 보이고, 조금 주눅들어 보이는 인상을 한 30대 중반 여자가 보였다. 후... 숨 한 번 고르고, 출발! 나는 살짝 미소를 머금은 다소 비굴한 표정으로 경비 아저씨 앞에 섰다. 한껏 겸손한 태도로 몸을 굽혀 인사를 드린 다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저, 903호 김마리인데요. 혹시, 요즘 층간소음 문제로...”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경비 아저씨가 내 말을 가로챘다. 아저씨보다는 사실 할아버지에 가까운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아니, 요즘 1304호 할아버지 때문에 말도 마세요. 윗집 아이들이 어려서 시끄럽게 구는 걸 갖고 새벽마다 우산으로 천장을 찍지 뭐예요. 그 주변 입주민들이 다들 너무 스트레스받고 있어요.“ 경비 아저씨, 아니 경비 할아버지는 장화 신은 고양이마냥 그렁그렁 눈물을 쏟아내기 직전인 눈빛을 하고선, 내가 어떤 불평 불만도 말할 수 없게 선을 그었다. “저...” 경비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기 말을 줄줄 읊었다. “저희는 힘이 없어요. 가서 경고 한번 잘못해서 민원 들어오면 다 잘리거든요.” 으악... 이건 마치 내가 경비 할아버지를 못 살게 구는 진상 입주민이 된 느낌마저 자아냈다. “저... 저기 그러니까...“ 경비 할아버지가 내 말을 낚아채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관리사무실 가서 말해보세요.” 내가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 경비 할아버지는 날파리도 뚫지 못할 만큼 촘촘한 방충망 뒤로 작은 샤시 창문을 쾅 닫아버렸다. 집단지성을 활용하려고 했던 두 번째 수사도 일단 실패로 끝이 났다. 숨 한 번 토해내고 나는 이 출동이 100퍼센트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게 아파트 단지 내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투게더’를 사왔다. 집단 지성에 실패한 나는, 씁씁한 마음을 달래며 이름이 ‘투게더’인 아이스크림을 아이러니하게도 나 혼자 얼른 먹어치웠다.


쨍그르르르. 아 또다. 내가 나 홀로 투게더를 먹는 동안, 또다시 조금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유리구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나한테만 들리는 건 아닐 텐데... 신기했다. 어쨌든 경비실에 다녀온 후로 한 가지 정보가 더 생겼다. 13층 할아버지에 대한 민원만 많이 들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왜 유리구슬 민원은 없는 것인가. 치칙치칙... 요즘 아파트 방송에도 귀 기울이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 유리구슬 소리에 대한 언급이 있을까 봐. 아무래도 오늘 내 경비실 방문까지 겹쳐서 관리사무실로 전달됐는지 그날 저녁 오랜만에 아파트 방송이 나왔다. “아, 아... 에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최근 101동에서 층간소음 민원이 많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특히 13층 부근에서 나는 소음들로 많은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으니...” 어쩌고저쩌고... 안내 방송에서도 13층 할아버지에 대한 경고만 섞여 있었다. 유리구슬... 유리구슬... 이 소리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어디까지 들려오는 걸까. 그날 밤, 나는 별다른 수확 없이 트인 귀, 아니 그 소리에 트인 내 마음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 유난히도 각성된 마음의 근육들. 깔깔이의 웃음소리. 나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수사에 대한 계획이라도 짜볼까. 나는 일단 소리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찐내향인인 나지만, 이웃들을 인터뷰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 요즘은 층간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타오백 한 박스와 따뜻한 쪽지를 남긴다고들 하던데... 나는 너무 궁금한 나머지 일단, 윗집, 옆집, 아랫집에 줄 비타오백 세 박스를 사왔다. 나는 내향인이라서 그들과 직접 대화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세 군데 모두 같은 내용의 쪽지를 붙였다. ‘안녕하세요. 903호입니다. 제가 최근에 층간소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어, 부득이 이런 쪽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유리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이 소리의 정체를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혹시 직접 소음을 내고 계신 건지, 아니면 다른 집에서 나는 이 소음을 들으신 건지 궁금합니다. 쪽지로 귀댁 문앞에 답장 붙여주시면 제가 알아서 떼가겠습니다. 답장 부탁드립니다.’ 비타오백을 현관문 옆에 놓고, 마스킹테이프로 쪽지를 붙인 뒤, 각각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돌아왔다.


다음 날, 쨍그르르, 어김없이 들려오는 유리구슬 소리와 함께 나는 이웃들의 답장을 수거하러 다녀왔다. 놀랍게도 세 집 모두 내게 답장을 남겨두었다. 그러니까 윗집 1003호, 아랫집 803호, 옆집 902호의 쪽지는 다소 평범한 인사말과 형식적인 말들이 쓰여 있기도 했는데, 어떤 쪽지는 나를 꽤 소름끼치게 하는 문장까지 담겨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803호의 쪽지.

미안합니다만, 유리구슬 소리는 저희 집과 관련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가끔 놀러오는데 그 소리가 신경쓰이셨을까요?

년도가 바뀌면서 신년회 홈파티를 꽤 열게 됐었어요.

아마도 그 소리들이 층간소음으로 느껴지셨을 것 같아요.

조곤조곤 조용히 말한다고 노력했는데 역부족이었나봅니다.

용서해주세요. 앞으론 저도, 저희 집 손님들도 더 조심할게요.

히히덕거리는 소리, 술 취해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는...

좀처럼 견디기 힘든 소음이라는 걸 잘 압니다.

해가 바뀐 만큼, 올해는 더욱 생활소음을 자제할게요.


추신. 903호님께서도 소음에 좀 신경써주세요.


나는 아랫집 803호의 쪽지를 먼저 읽었다. 사과를 받긴 했는데 뭔가 애매한 느낌이다. 나에게도 소음에 좀 신경을 써달라니... 이건 사과인지 경고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유리구슬 소리가 자기 집과 관련이 없다고만 밝혔을 뿐, 유리구슬 소리를 들어봤는지 아닌지도 대답이 모호하다. 나는 서둘러 다음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902호의 쪽지.

아, 유리구슬 소리 말인가요?

그건 저도 꽤 자주 듣습니다만...

유리구슬 소리를 들은 건 꽤 됐어요.

다만... 그 소리는... 아, 아닙니다.

어쨌든 저희 집 거실과 903호님의 안방이 벽을 마주하고 있을 텐데...

혹시 제 생활소음도 들리나요?


902호의 쪽지는 더 기기묘묘하다. 내가 유리구슬 소리를 듣게 된 건 고작 일주일 전쯤이다. 옆집 깔깔이가 꽤 자주, 게다가 꽤 오래 전에 그 소리를 들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였다. ‘다만’이라는 표현도 좀 거슬린다. 그 소리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말을 아낄까? 음, 게다가 자기 생활소음도 들리냐니... 이건 좀 너무했다. 나는 그 소리를 매일매일 침실에서 밤 12시에도 듣고 있는데. 진짜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헷갈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1003호의 쪽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003호의 쪽지.

일단 비타오백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유리구슬 소리 말이지요.

그 소리 때문에 우리 애가 계속 깨요.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죠?


1003호의 쪽지는 가장 짧고도, 시니컬했다. 803호의 쪽지만 약간의 예의를 갖췄을 뿐, 다른 두 집들의 쪽지는 마치 나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뭔가 마음속에 돌덩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도 들었다. 혹시 저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내가 며칠전에 구입한 유리구슬로 구슬치기를 했을 때 난 소리 때문일까. 속상하다. 나는 정말이지 갑자기 유리구슬 층간소음의 범인으로 지목된 것 같아, 억울함이 목 위로 꾸역꾸역 올라와서 억지로 참아내야 했다. 흠, 어쨌거나 중요한 건 유리구슬 소리가 내가 들은 환청은 아니었던 게 분명해졌다. 아랫집은 애매하게 답을 피해갔지만, 옆집과 윗집 다 나처럼 유리구슬 소리를 들어온 것 같았다. 아니, 나보다 되레 유리구슬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민원은 넣지 않았을까. 약간 불친절한 쪽지를 보며 또다시 물어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나는 쪽지들을 한 번 더 읽어보았다.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다시 읽었을 때 나는 행간에 숨은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맙소사.


아랫집의 쪽지는 뭔가 부자연스럽게 공손했다. 꼼꼼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가는데, 그 쪽지의 세로줄이 갑자기 한눈에 들어왔다. ‘미, 친, 년, 아, 조, 용, 히, 좀, 해.’ 미... 미친...년? 내가? 내 세상이 한여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줄줄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겨울왕국에서 안나를 구하려고 벽난로 불을 함께 쬐던 올라프가 녹아내릴 때의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 더 비슷할까. 나는 갑자기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상황 파악이 한번에 되지 않았다. 살면서 저렇게 날것의 표현을 들은 적이 없어서, 나는 머리가 띵하고 호흡이 가빠져왔다. 미... 미친 년이라니, 내가요? 다른 집 쪽지들도 가까스로 다시 확인해보았다. 다행이다. 욕이 없다. 그런데 정말 이게 다행인 걸까.


나는 며칠 전에 샀던 유리구슬을 다시 꺼내보려고 서랍을 열었다. 책상 첫 번째 서랍이었다. 무슨 일이지. 서랍 속에 24개의 유리구슬이 아니라, 240개쯤 되는 유리구슬이 들어 있는 듯했다. 내 집에, 내 서랍 속에,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번 째 서랍을 열었다. 두번 째 서랍 속에도 유리구슬이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두번 째 서랍이 끼익거리며 맞물며 따라오다가 밖으로 튕겨나왔다. 마지막 서랍에는 유리구슬이 한가득 반짝거렸고, 두번 째 서랍이 떨어지면서, 수백 개의 유리구슬이 일제히 바닥으로 흩어졌다. 쨍그르르르. 몇 개로는 나지 않던 그 소리가, 수백 개가 동시에 굴러떨어지니 드디어 그동안 들었던 소리와 완전히 동일한 소리가 울렸다. 평소에 내가 듣던 소리가 솔로 연주라면, 이건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웅장한 소리였지만. 그렇지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나에게 유리구슬이라곤 며칠 전에 주문했던 24개밖에 없는데. 누가 몰래 우리 집에 들어온 걸까. 왜 내 서랍 속에 수백 개의 유리구슬이 들어 있는 걸까.


나는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 몸이 불에 달군 유리를 세공하듯 주욱주욱 늘어지는 느낌도 함께 따라왔다.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엔 벨이 없다. 내가 처음 이사왔을 때부터 벨이 없었다. 나는 “누... 누구세요” 목소리를 쥐어짜서 억지로 말했다. 현관으로 가려고 했지만, 어지럽고 메스꺼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잠, 시, 만요.” 내 말이 들렸는지 바깥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면 벌써 돌아가버렸나? 나는 귀가 물에 잠긴 것처럼 답답해졌고, 숨을 쉬려고 애쓸수록 숨이 가빠졌다. 호흡곤란으로 죽는 건 아닐까. 나는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졌다. 유서도 써놓지 못했는데, 내 남은 가족들은... 내 친구들은... 나의 지인들은... ‘어떡해, 정말 죽을 것 같아’ 정신이 몽롱해지는 사이, 목에서 올라오는 역겨운 구토감은 더 생생해졌다. 나는 화장실로 기어가서 변기에 토를 했다. 빗길에 젖은 양말처럼 축축해진 목구멍과 혓바닥, 찝찝한 입냄새, 땀에 젖은 내 얼굴, 내 팔다리, 내 가슴, 내 허벅지, 내 발바닥...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것 같은 순간, 모든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 착각일까. 아니면 실재일까.


한 시간쯤 흘렀을 것 같다. 조금씩 숨이 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생각해! 생각해!’ 나는 숨쉬기 힘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여전히 바깥에 누군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어보았다. 없다. 무언가 문옆에 놓여 있었다. 바...박카스? 박카스 한 박스였다. 혹시 하고 현관문 바깥을 확인했다. 쪽지다! 803호가 붙이고 간 쪽지. 나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쪽지랑 박카스 한 상자를 챙겨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쪽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격렬하게 싸웠다. 나는 숨을 참았다가 내쉬고, 다시 들이마셨다. 쪽지를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참다 참다 못 참고 홧김에 쪽지에 심한 말을 써버렸네요. 사과드립니다. 903호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약 잊지 말고 챙겨 드세요.“ 나도 모르는 내 사정? 약? 무슨 약을 챙겨 먹으라는 거지. 나는 뒤틀리고 찢어진 기억 조각 속에서 희미한 단서를 발견해내고선, 존재감 없는 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반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정체 불명의 약봉지들. 봉투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는 어느 정신건강의학과로 연결되었다. 내가 이것저것 물었더니 간호사가 다소 당황하는 듯하다가 답했다. 내가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우울, 불안, 수면장애가 심해서 정신행동증상에 대한 약물치료를 그 병원에서 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알츠하이머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도 메모해두라며 알려준 뒤 전화를 끊었다. 조발성 알츠하이머. 나는 인터넷에 바로 검색해보았다. 내가 젊은 치매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뉴스에는 공통적으로 고혈압, 우울증, 신체 활동 부족, 당뇨병, 사회적 고립 등도 조기 알츠하이머의 위험 요인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내가 20대까지는 회사에 다니다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뒤, 바뀐 나의 일상과 내 몸 상태는 그 요인들과 꽤 많은 교집합을 지니고 있었다.


유리구슬들은 여전히 안방과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유리구슬을 치우기 시작했다. 유리구슬을 비닐봉지에 쓸어 담았다. 쨍그르르르. 아, 이 소리다. 내가 들었던 유리구슬 소리. 내 기억 조각들이 뒤엉키면서 나는 내가 냈던 소리를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착각했던 걸까. 나는 환청을 듣게 됐던 걸까. 유리구슬 소리는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와는 다르게 정말 맑았다. 너무 맑아서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수백 개의 유리구슬을 하나하나 치우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유리구슬까지 집어 다시 서랍 속에 모두 넣었을 때, 두번 째 서랍이 튕겨 나오며 와르르 쏟아지던 유리구슬처럼, 내 눈은 맑고 투명한 눈물을 와르르 쏟아냈다.


나는 갑자기 기억해냈다. 병원에서 처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던 그 순간을. 나는 2년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고, 작고 오래된 이곳 아파트로 요양원에 들어가듯 이사 왔다. 나는 이곳에 나를 숨겼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다. 30대 중반에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나는 점점 고립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어렸을 적 갖고 놀던 유리구슬을 샀다. 20평에 갇힌 나의 소우주에서, 유리구슬을 만지작거리는 내 행동은 나를 지금이 아닌 그때로 데려가는 듯했다. 나는 유리구슬을 조금씩 더 사들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유리구슬을 산 건지, 유리구슬이 나를 산 건지 모를 상태가 되어버린 거였다. 내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 여전히 두렵다. 두려울 때마다 유리구슬을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혼자 1인 2역을 하며 구슬치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져서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나는 두렵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내가 점점 침잠해간다는 그 사실이.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공표하는 순간, 나는 사회에서 영원히 고립되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자꾸 따라다닌다. 나는 어떻게 내 생의 마지막을 살아내야 할까. 잠깐 소강 상태였던 내 눈의 유리구슬이 쨍그르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눈물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을까. 나는 갑자기 그 순간의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쨍그르르르. 또 유리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아니, 유리구슬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게 굴러가는 소리가 평범한 가정집에서 날 리가! 그르르르르. 또다. 이 소리는 아주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어느 날은 아침에, 어느 날은 점심 때, 어느 날은 꿈결에 들려온다. 그런데 조금 묘한 느낌이 든다. 오늘따라 유난히 이 순간이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날처럼 느껴진다. 아니지, 이런 독특한 경험을 두 번 겪을 리는 없다. 나는 다시 아까 하던 생각을 이어갔다. 유리구슬 소리에 대한 생각. 죽어라 공부해온 영어에는 귀가 그리도 안 트이더니, 아주 슬프게도 일제히 들려오는 그 맑은 소리에 내 귀가 100퍼센트 트이고 말았다. 층간소음에서는 ‘귀가 트인다’는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한번 알아듣기 시작하면, 영원히 들리는 그 소리들. 어쩌면 그 바람에 내 꿈속에서조차 그 소리가 나를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일주일 전부터 들려온 소리다. 내가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 이사 온 지는 딱 2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