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35 후광과 아우라, 그리고 카리스마

by 한우물
어떤 만남

2층 카페에 들렀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앞서 기다리던 사람들 틈에서 수액 폴대를 잡고 서 있던 60대 중반의 여자 환자가 내게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가 내게 초음파 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 환자이겠거니 생각하고 고개 숙여 답례한 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자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 생각해 친근하게 말을 놓았다.

"이게 누구야?"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뜬금없었다.

"저는 항운병원에서 왔는데 선생님은 어느 병원에서 왔어요?"

오잉? 나보고 어느 병원에서 왔냐니?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제1병원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실은 그녀와 나는 초면이었다.

이 병원 건물에는 내가 근무하는 대장·항문 전문병원 뿐아니라 성형외과와 안과도 있어, 그녀가 물은 건 그 셋 중 어디 병원 소속의 의사인지 인지 물었던 것인데, 나는 지난 8개월간 잠시 몸담았던 ‘제1병원’ 이름을 대며 동문서답을 한 것이다.


"아까 저한테 아주 반갑게 인사하시던데, 혹시 저를 아세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워낙 멋지셔서요."

허! 처음 보는 여자에게서 이런 말을 다 듣다니. 그것도 이 나이에.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내가 웃어넘기려 하자 그녀는 한술 더 뜬다.


"선생님에게는 후광이 비쳐요. 그래서인지 뭔가 편안한 기운이 감돕니다. 예전에 반기문 총장님을 뵈었을 때도 딱 이런 후광이 느껴졌거든요.“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번엔 반기문 총장에 후광까지!

혹시 신들린 사람인가?

"아이고,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디가 편찮으셔서 입원하셨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답을 듣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그녀를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어떤 인생

그녀는 자궁에 혹이 많아 대변 조절이 잘 안돼 이틀 전 자궁적출술을 받았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변실금과 요실금 증세까지 있어 추가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털어놓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갉아먹는 병, 실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갔다. 의사로서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나는 내 저서 『아무튼 사는 동안 안 아프게』 한 권을 꺼내 사인을 해 건넸다.


"이 책에 항문 괄약근을 튼튼하게 하는 훈련법을 자세하게 써뒀습니다. 치료 잘 받으시고 댁에 돌아가시면 꼭 꾸준히 운동해 보세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거제도에서 오래 살았다는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한 후 19년 동안 홀로 딸을 키워냈다. 이후 재혼했지만 최근 몇 년간 겹친 악재로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앓으며 마음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오늘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나를 만난 것이 큰 행운처럼 느껴졌단다.


"오늘 선생님께 너무 밝은 기운을 받았어요. 안 그래도 마음이 매우 우울했는데, 선생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니 마음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내가 한 줄기 따뜻한 빛이 되었다니, 오히려 내 마음이 더 따뜻해지고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후광(後光, Halo), 아우라(Aura), 카리스마(Charisma)

그녀가 건넨 ‘후광’이라는 단어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30여 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시절, 학회 참석차 서울에 갈 때면 이른 아침부터 공항으로 마중 나와 나를 픽업을 해주던 초음파 의료기기 회사의 여성 임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운전 중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교수님께는 어떤 아우라가 느껴져요."


평소 ‘카리스마 넘친다’는 말만 들어오던 나에게 ‘아우라’라는 표현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 울림은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문득 궁금해졌다. 환자가 말한 ‘후광’과 임원이 말한 ‘아우라’는 같은 것일까? 그리고 내가 젊은 시절 듣던 ‘카리스마’와는 또 어떻게 다를까? 그래서 파고 들었다. 공부를 해보니 세 단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칭하지만, 그 기원과 뉘앙스는 사뭇 달랐다.


후광(後光)은 글자 그대로 '등 뒤에서 비치는 빛'이다. 불교 미술이나 서양 성화(聖畵)에서 성인의 머리나 몸 뒤에 그려진 둥근 빛을 떠올리면 된다. 이는 그 인물이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지혜, 자비, 그리고 높은 격조를 지녔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아우라(Aura)는 ‘산들바람’이나 ‘숨결’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αὔρα(aura)’ 에서 유래했다. 그 후 라틴어, 영어로 넘어오면서 사람이나 사물 안에서 밖으로 은은하게 퍼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독특한 기운이나 분위기를 뜻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예술 작품의 복제품에서는 느낄 수 없고 원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진품성’이 주는 분위기로 개념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카리스마(Charisma)는 고대 그리스어 χάρισμα(카리스마)에서 기원한 말로 '신의 은총' '신의 선물'을 뜻하여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여겨 아주 중요시한 단어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해 ‘비범한 자질로 타인을 이끄는 강력한 힘’이라는 세속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측정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파동

이 세 단어는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맞닿아 있다.

굳이 그 느낌을 구분해 본다면, 카리스마가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힘’이라면 아우라는 ‘은은하게 감싸는 기운’에 가깝다. 그리고 후광은 이 둘을 넘어선, 더 신성하고 존엄한 ‘구원적 존재’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고통받던 환자가 내게서 본 ‘후광’은 절박한 상황에서 마주친 일종의 ‘구원의 빛’이었을지 모른다. 임원이 느꼈다던 ‘아우라’는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가 뿜어내던 독보적인 존재감과 무게감이었을 테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던 ‘카리스마’는 타고난 보스 기질(장형 8번)에 리더의 추진력이 더해져 발산된 강한 에너지였을 것이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소리는 소린데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 즉 초음파와 함께 살아왔다. 덕분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후광도, 아우라도, 카리스마도 마찬가지다. 측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파동임을.


진정한 후광이 되어 서로를 비추다

이번의 우연한 만남은 내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7년. 사회적 존재감은 이미 희미할 대로 희미해졌고, 내가 짊어진 지체장애라는 짐은 날로 무거워져 하루라도 빨리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요즈음이었다.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우울의 늪에 빠져있던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아직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내게서 보았다는 그 후광은, 어쩌면 그녀의 간절함이 내게서 찾아낸 빛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빛은 그녀의 마음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반사되어, 꺼져가던 내 삶의 의지를 다시 환하게 비추었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서로에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가 될 수 있다. 진정한 후광과 아우라는 특별한 자들의 타고난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발원하여, 서로를 감싸 안을 때 생겨나는 ‘따뜻한 파동’이다.


이런 파동이 넘쳐날 때, 이 지구별은 얼마나 밝고 훈훈한 세상이 될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렇게 만들 수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