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의 에어컨 실외기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종일 웅웅거린다. 덕분에 낮 동안 집 안의 열기가 다소나마 누그러진다. 한낮의 열기를 어찌어찌 견디다가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이면 창밖을 내다보며 그래도 기대를 하게 된다. 어둠이 선사할 순해진 공기를, 숨 고르며 호흡이 편해질 밤의 시간을.
그러나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하는 열대야가 여전히 독기를 품은 채 우리 곁에 진을 치고 있는 듯하다.
거의 24시간 에어컨을 가동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시 끈다. 창문을 연다. 어슴프레 밝아오는 새벽 하늘빛이 반갑다. 아직은 태양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각. 좀 있다 태양이 눈을 뜨고 다시 심기 일전하여 온 세상에 내리꽂을 살기에 가까운 열기를 상상하자 가벼운 몸서리가 인다.
그런데 그 이른 새벽 창을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매미 울음소리다. 에어컨 가동 시 창문을 닫고 있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 사람들과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도시의 소음이 잦아든 새벽녘, 쨍한 매미 울음소리는 잠시나마 잊고 있던 한낮의 열기를 재빠르게 소환한다. 밤새 잠도 안 자고 울어 재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성하의 계절이면 어김없이 세상의 모든 공간을 점령하듯 울려 퍼지는 그들의 울음소리. 아예 떼창이다. 도심 마을마다 공원 길 나무 숲 속에서 매미들은 꼭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듯 온 힘 다해 소리를 뿜어낸다.
어느 날 아들이 짜증을 냈다. 자동차 소리, 배달 오토바이 소리도 지겨운데 제 내들은 밤낮없이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니 짜증 난다고. 소음도 저런 소음이 없다고.
그 말에 얼마간 동의하다가 문득 언젠가 들었던 매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암컷 매미가 알을 낳으면 그 알이 애벌레(유충)로 자라나고 그 유충은 땅속으로 들어가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며 3-7년 동안 살다가 어른 매미가 된다. 종류에 따라 땅속에서 13-17년 이상의 암흑의 시간을 보내는 매미도 있다고 한다. 땅속에서 나무뿌리의 수액을 먹으며 오랫동안 준비하던 유충은 지상으로 올라와 등껍질을 벗고 그제야 성충이 되는 것이다. 성충의 수명은 약 한 달 정도다. 수컷 성충은 암컷과 짝짓기를 한 뒤 죽고 암컷은 알을 낳은 뒤 죽는다. 한마디로 오랜 기다림 끝에 잠시 피어나는 순간을 가지는 게 매미의 일생인 것이다.
100년 가까이 사는 인간의 눈으로 보니 세상 밖으로 나온 이후 한 달 정도의 삶이 허락된 매미들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슬프다.
아니다. 매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자신의 일생이 왜 이러냐고 원망하고 슬퍼할까?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견디다가 이제 겨우 바깥세상으로 나오니 원 없이 소리 지르나 보다.
목청껏 소리 내어 노래하는 게 저들의 존재 이유인 양 온종일 그침이 없다. 그 소리에 지친 기색도 없다.
높이와 음량 진폭 등을 일정하게 세팅해 놓은 기계음처럼 일정하다.
그렇게 그들은 여름이라는 강렬한 색깔의 풍경화 속에 한 장면을 장식한다.
한 달 남짓의 삶을 위해 땅속에서 수년을 버틴 그들.
길게 한껏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매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후회 없이, 무엇하나 아랑곳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순도 높은 고음으로, 자신이 이 계절, 화려한 무대의 유일한 주인공 인양 목청껏 소리 지른다. ‘나 여기 있다’고.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삶이 한 달여 후에 마감된다는 것을.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을.
엊그제 친구의 울먹이던 전화 목소리가 생각난다. 나이 쉰도 안 된 남동생이 암 진단을 받았다고. 그것도 말기. 너무나 건강하고 멀쩡하던 피붙이가 생각지도 못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생을 마감해야 한다니, 하며 울었다.
그녀가 느꼈을 절망감, 안타까움, 원망, 무력감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삶.
한 달이라는 생명의 시간만이 허락된 매미의 일생.
매미든 나무든 인간이든 이 세상 만물의 삶을 주재하는 창조주, 온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무한한 힘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통과의례처럼 나 역시 한동안 실존주의니 허무주의니 하는 것들에 빠져 허우적댔었다. 존재니 본질이니 선택이니 자유니 따위의 추상명사들의 바다에서.
특히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졌다는 생각은,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다가 아니라 이상하게도 무력감과 허무감을 안겨주었다.
존재의 고민을 혼자 떠안고 사는 듯 염세와 우울감을 외투처럼 걸치고 살았던 기억.
지나고 나니 그때의 고민들은 가끔 아름다운 허세로 추억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내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울하게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신의 의도든 변덕 때문이든 매미는 매미로 인간은 인간으로 나무는 나무로 각자 그렇게 태어난다.
존재의 시작은 나의 의지와 무관했지만 한 달이든 10년이든 20년이든 내게 허락된 시간을 정직하고 의연하게 살아내는 것은 나의 의지이고 나의 선택이다.
아니, 그렇게 살자고 다짐하며 나에게 매 순간 주문을 건다.
긴 시간 땅속에서 준비하고 세상에 나와 잠깐을 살고 2세를 만든 후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는 매미의 일생은, 그렇다, 얼마나 담담하고 의연한가?
묵묵히 준비하고 살아내고 내어주고 또 그렇게 사라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늦은 밤 지금도 매미의 떼창은 배경음악처럼 창밖에서 흘러 들어온다.
그게 무엇이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온 힘을 다하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아름답다.
남아있는 생명의 시간이, 허락된 삶이 얼마 아니라 해도.
움직이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을 떠올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해질 수 있으시기를, 묵묵히 살아내고 모든 걸 내어준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맑고 담담한 목소리로 노랫가락을 읊조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입추다. 이제 스러져가는 계절임에도 아랑곳없이 목소리 쨍쨍한 매미의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신이시여, 축복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