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글 Apr 29. 2024

여자친구가 임신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강박증의 주요 메커니즘은 "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물론 이것도 아직 나의 무의식을 제대로 해체하거나 본격적인 자기 상담에 들어간 건 아니기에 그냥 추정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래도 현재 확실하게 내가 심하게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부분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증상을 집어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여자친구가 임신하면 어떡하지?'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시작점은 '나의 강박 해방일지' 2편에서 이야기한 “내 강박의 시작”에서 나와있다. 바로 전 여자친구가 카페에서 나에게 "근데 성관계를 하진 않지만, 비슷한 행위를 통해 남자의 정액이 여자의 중요 부위에 들어가면 어떡하지?"라고 말한 순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건 전혀 머리에도 없던 그냥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됐으며 2차 성징도 일어나고 또 이성에 대한 관심도 생기며,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성지식도 습득해 나가고 올바르게 이성을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하는 딱 그런 나이었다.

그렇지만 그 질문으로 불이 붙어버린 내 강박증으로 나는 이 시기에 올바른 성지식을 습득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온갖 상상과 불안으로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걱정, 그리고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오히려 먼저 걱정을 시작한 여자친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졌고, 그 이후에는 그런 행동을 해도 딱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심하게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위로해 주거나 때로는 화를 내거나, 딱 그 정도였다.

진짜 문제는 "나"였다. 그렇게 찾아온 생각을 그냥 보내줬어야 하는데... 대체 그 생각이 어떤 두려움을 촉발하고 내 진정한 불안이 뭐길래.. 그토록 감추고 싶어서 현재의 강박증을 만들게 되었을까. (이런 강박증의 개념과 관련된 부분은 후속 편에서 더 다루도록 할게요!)


나는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여자친구 임신 가능성', '손에 묻은 정액으로 임신되나요', '속옷끼리 닿아도 임신되나요' 등 아주 다양한 검색어를 동원해 어떨 때 임신 가능성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도 안다. 남녀가 성관계를 하는 게 아니면 임신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근데 문제는 가끔 답변 중에 '그런 방식으로 임신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꽂힌 부분은 바로 "거의"라는 워딩이다.

‘거의라는 건 다르게 말하면 있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럼 저런 행동들이 대부분은 임신을 시키진 않지만 어쩌다 보면 될 수도 있는 거네?’ 바로 이게 내 강박증의 초기 문제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친구가 임신하는 그 상황이 올 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1%의 확률조차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이런 걸 물어보기조차 겁이 났다. 가족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일단 내가 여자친구와 성관계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했고 그러기엔 너무나도 부끄럽고 혼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친구한테 물어보자니.. 그것 역시 부끄러웠다. 나에게 "성"이라는 것 자체는 조금 불결하고 변태스럽고 부끄러운? 그런 이미지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가 온전히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검색뿐이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성욕, 임신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두려움... 이것이 합쳐져 여자친구와 그런 행동을 충동적으로 또다시 하긴 하지만, 그 이후에 여자친구가 생리를 하기 전까지는, 즉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매번 내 인생은 "지옥"이었다.


매일 틈만 나면 하는 행동은 그 당시에 여자친구에게 정액이 안 묻게 잘했나?라는 반추적인 생각과 혹시 내가 한 행동이 임신을 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끊임없이 인터넷에 검색하는 것,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임신 초기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생리를 안 하진 않는지 계속 집착적으로 체크하는 것, 마지막으로 매일 밤마다 잠도 못 이루고 심한 걱정을 하며 혹시 임신하면 난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를 반복하는 것... 그게 내 고등학교 때의 인생의 거의 전부였다.


이런 남자친구를 사실 어떤 여자가 지치지 않아 하겠는가.. 당연히 여자친구는 지쳤고, 결국 나와 이별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연애를 하지 않으면, 강박증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임신"에 대한 강박증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일단 집에서도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혹시 엄마나 누나와 같이 쓰는 수건이나 화장실에 정액이 묻은 건 아닐지 걱정하기 시작했고, 엄마나 누나의 빨래를 만지거나 건조대에 걸 때도 매우 조심했다. 자연스럽게 매번 손에 뭔가가 묻었을 거라 생각하고 손을 닦는 것에 집착했다. 그리고 정액이 묻었을 것 같은 공간이나 위치는 매번 물티슈나 휴지를 이용해 깔끔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지금 내 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있고, 나는 그녀를 "나에게 찾아온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다 해도, 당장 이러한 행동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연애를 하다가 스킨십을 시작한다면, 분명 과거의 증상들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혹시 그녀의 옷에 뭔가가 묻지는 않았을지, 내가 더러운 손으로 그녀를 만지지 않았을지, 그녀가 앉는 자리에 정액이 떨어져 있는 건 아닌지.. 등 다양하고 사소하게 내 강박증은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이야기한 연애를 하면 생길 수 있는 첫 번째 제약의 영역이다.



이전 04화 내가 행운을 잡기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