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통의 인사말
처음 만나는 이에게 나를 소개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통이라고 합니다."라는 소개는 도저히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인상적인 인사말을 건네자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리한다는 인상을 줄까 덜컥 겁을 먹기도 한다. 또 마음 한편에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단 몇 마디로 남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 막막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난 혼자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몇 가지 단어들을 빌려 '도통'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당신과 이 인사말을 처음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나중의 글들을 통해 이 글을 만나게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적는다.
도통
우린 골똘히 생각하다가 결국 모르겠을 때 "야, 도통 모르겠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기에 도통은 언제나 무언갈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 깨닫고 그에 능통한 사람에게 '도통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도통 모르겠는 것을 마주해 그것에 도통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의 필명을 '도통'으로 짓게 되었다.
도통의 영문 표기는 'doton'이라 정했다. 이는 dot on에서 차용했는데, 말 그대로 점을 찍는다는 의미이다. 입시를 마치고 파리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파리에서의 다른 기억들은 사진을 곁들여야 선명해지지만, 바실리 칸딘스키의 [흰색 위에 II(Auf Weiss II)]를 마주하고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던 기억은 돌이킬 때마다 뚜렷하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도 서점에 들러 그의 회화 이론서인 [점선면]을 구입해 여러 번 읽으며 작품의 구성을 되짚어 본 것이다. 그중 화폭 위에서의 점의 창발과 확장성에 관한 부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칸딘스키의 발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회상은 이만 차치하며, doton이란 이름엔 결국 어떤 공백이든 점을 찍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누군가의 이상향이나 목표를 담은 자신만의 캐릭터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 순간을 언제나 상상하곤 한다.
0
번호 매김이 필요한 글쓰기에 있어서 나는 0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습관이 시작된 데에 명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덧붙여보자면 1은 과하게 웅변적이라 느껴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시작에 있어 0이란 숫자를 던져 놓는 일은 일종의 백지이자 명쾌한 시작을 망설이는 나의 변명을 위한 공백이다. 읽지 않아도 글의 이해에 큰 지장이 없을 것만 같은 0의 단락. 그러나 그 0의 단락에 나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이 녹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운명이란 개념에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때론 운명이란 거대한 의지에 자유를 모조리 박탈당한 듯한 무력감을 주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는 거대한 힘 앞에 내던져진 자신을 한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것이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그 경험과 충분한 거리가 생겼을 때 잠시 추측할 수 있는 사안일 것이기에 난 차라리 운명애를 되새긴다. 모든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또 필연적으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세계에서의 결과를 희구하며 후회를 곱씹게 되고야 만다. 덴마크의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는 그의 저서 [연극인류학]에서 사츠(sats)라는 연기 이론 개념을 제시하는데, 사츠란 배우의 움직임이 시작되거나 변화하는 순간에 존재하는 선표현적(pre -expressive) 에너지 충동 또는 준비 상태를 의미한다. 많은 변인이 - 특히 시간이란 비가역적 요인을 조정할 수 있는 -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사츠는 배우의 집중을 함축하는 무게 중심으로 작용하지만 현실에 놓인 우리는 아무리 촘촘한 사츠를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운명이 비집고 들어오는 빈틈을 모두 막아낼 순 없다. 일단 힘이 닿는 데까지 사츠를 훈련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운명의 비틀린 성정에는 허심탄회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철이 없었다. 그럴듯한 취미가 가지고 싶어 책 목록을 뒤적거리다 흄의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를 읽으려 했다니. 취미에 고상한 기준이라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명석한 철학자가 제시하는 취미의 기준을 알고 나면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 중 남들에게 자신 있게 선보일 취미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다. 다음으로 부끄러운 사실은 흄이 말하는 취미는 내가 생각한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라는 것이다. 이 사실 자체도 나중에 미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초반 몇 장을 읽다 포기했던 것 같다.
지금은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다. 하루키의 하루 일과라고 돌아다니는 게시물을 보고 시작했다. 그 일과가 사실일지, 사실이라면 정말 매일하고 있을지 알 도리는 없지만 하루키가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까지 쓴 걸 보면 읽음직한 글을 쓰는데 달리는 게 도움이 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작한 것 같다. 이제야 한 번에 10km 정도를 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은 수준이 된 정도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취미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취미에 관해서 항상 뒤따라오는 의문은 '깊이'에 관한 것이다. 무엇을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아니 이제는 나 자체라고 생각되는 못된 검은 화면은 어떻게든 이미 그 취미를 전문적으로 즐기는, 실력이 뛰어난, 구력이 오래된 사람들의 게시물을 띄워준다. '어느 정도 하는 걸론 취미라고 말도 못 하겠구나' 하는 순간 팍 질려버린다.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말이다. 지금은 나는 그저 깊이보단 너비의 확장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이것저것 찔러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깊이를 갈구하게 되는 지점에 도착할 것이라 믿는다.
언어가 없는 세계에서 공감은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전적으로 배타적이며 지배적인 조망권을 지닌다. 아무도 나와 동등하게 나의 마음에 대해 조망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심적 상태에 대해 어떤 다른 존재도 완벽하게 인지할 수 없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개인의 질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감각질(qualia)라고 한다. 고통은 감각질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나의 고통은 나만이 온전히 감각할 수 있다. 타인은 그저 짐작할 뿐이다. 우리는 의사에게 나의 고통에 대해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지만 의태어를 섞은 추상적인 표현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신체적 고통은 관찰을 통해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지만 심적 고통은 더욱 어렵다. 공감은 언어라는 도구로 해결되지 않는 한계를 가진다.
언어는 심지어 감각을 왜곡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다'는 표현이 있듯이 우린 실제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경험하곤 한다. 감각의 순간에는 지독히도 아팠던 경험이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아무렇지 않아 진다. 앞서 말한 배타적이며 지배적인 조망권도 결국 그 당시의 자신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어는 우리가 자신의 감각을 전달하고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가장 정교한 도구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LLM) 기반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인간과 같은 마음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란 인간의 전망은 아무래도 틀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인간의 감각으로 정교하게 공감의 토대를 지어나가고 싶다. 언어의 표면적 의미 너머의 울림을 전달하여 각자의 마음에서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을 적어내고 싶다.
나
십 년 전의 나, 아니 당장 일 년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매일 적은 다이어리의 내용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든 세포가 죽고 대체되어 온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정말 십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실제로 같은 시간선 상에 둘을 병치할 수 있다면 둘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나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설정했을 때 연속성 차원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너무나도 많다.
물리적으로 나의 경계를 확정할 수 없다면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배타성은 어디서 오는가? 흄의 진단처럼 난 감각의 집합이나 다발체일 뿐이며 우리는 정신의 극장을 떠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인 것일까? 분신과도 같은 스마트폰 화면상에 부유하는 수많은 정보들에 치이다 보면 문득 현실에서 숨 쉬는 나보다 인터넷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나의 데이터들이 내 삶의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덮쳐온다. 내 생각이라 여겼던 것들의 기원이 사실은 내가 아닌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따지고 보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고유한 나만의 것은 없지 않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지는 나의 마음에 대한 독점적인 조망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치열하게 글로 구체화하기를 다짐한다. 감각을 뭉뚱그리지 않고, 타인의 표현에 의탁하지 않고, 한 마디씩 조각하듯 새기며 살고 싶다. 그것이 지금 당장은 내가 글을 쓰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