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이 맞지 않는 의자와 낡은 테이블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놓여있는 옥상을 돌아보며 향미는 단골 카페에 들어선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하나같이 허름하고 낡은 의자와 테이블을 보면서 향미는 그 꼴이 꼭 자기 같기도 하고 인섭 같기도 하고 무철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부장 같은 사람은 여기 낄 수 없다. 왜냐. 그는 어디 하나 온전하지 못한 게 아니라 완전히 고장 난 거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인섭이 향미의 곁으로 걸어왔다.
"요즘 좀 바쁜가 봐?"
향미가 옥상에 올 때마다 마주치던 인섭을 요즘은 세 번에 한 번 꼴로 마주쳤다. 이곳에 먼저 와있고 더 오래 머무는 건 인섭이었는데, 최근엔 향미가 더 오래 더 자주 머문다. 향미의 말에 우물쭈물하는 인섭을 보니 뭔가 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이걸 모른 척할지 아니면 파고들어야 할지. 향미의 그런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인섭은 자신을 향한 향미의 관심을 다른데 돌리려는 수작이 뻔히 보이게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그 얘기 들었어? 이 부장이 박무철 상무를 만나러 회사에 왔다던데?"
별 시답잖은 얘기겠거니 했는데 웬걸, 이건 향미가 모르고 있던 일이다. 박무철 이 인간에게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달라고까진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자신에게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섭을 의식해서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향미는 뒷 목이 뻣뻣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관심사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인섭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이 부장과 박 상무 어느 쪽에서 먼저 주선한 자리 인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다는 것, 하지만 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게 분명하다는 것, 누군가는 곧 이 부장이 복귀할 수도 있다고 점치고 있고, 이 일로 박 상무의 입장이 여러모로 난처해졌다는 것. 자신이 사무실에서 테스트를 거듭하는 사이 회사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다니. 냄새를 맡으라고 했지 귀를 막으라고는 안 했는데 향미는 회사 돌아가는 소식에 무심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원망스럽다.
이 부장이 다시 돌아온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시끄럽다는 인섭의 말에 향미는 자신은 속이 시끄럽기보다 메스껍다고 말했다. 이 부장 그 인간 얼굴을 다시 볼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향미는 목구멍에 신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신물이 더 올라오기 전에 침을 한번 깊게 삼킨 향미의 머리에 번뜩 생각이 스친다. 가만 보자, 회사 소식에 그리 빠른 편이 아닌 인섭이 이런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거지? 인섭이 알 정도면 향미 자신이 몰랐을 수가 있을까. 사람들이 오가며 이 부장에 대해서 떠들었다면 분명히 향미도 알았을 텐데.
향미에게 있어 눈에 훤히 보이는 사람이라는 범주에 있던 해파리과 인섭이 그 어느 때보다 낯설다. 인섭, 너에게도 뭐가 있는데 이거. 냄새가 나, 냄새가.
"사실, 박 상무님이 따로 부탁한 일을 하고 있거든."
향미가 던진 몇 개의 질문과 단호한 넘겨짚음과 날카로운 추궁 끝에 인섭은 요즘 옥상에 자주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 이유에 또다시 무철이 등장한단 말이지. 인섭을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가 무철에게로 슬슬 옮겨간다. 무철은 자신에게 전부는커녕 일부도 알려주지 않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무철이 하고 있는 그 일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다.
함께 나쁜 짓을 하자던 무철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인섭은 끝내 무철의 지시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까지 말하지 않았다. 인섭이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 문득 향미는 무철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손바닥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알고 있는 것이 손톱보다도 작잖아?
왜 진즉 이것을 파보려고 하지 않았나. 그놈의 손에 취해서, 바보처럼. 향미는 무철의 지시로 진행하고 있는 테스트를 떠올렸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에서 나는 것과 닮아있던 수상한 냄새. 그 냄새만큼이나 박무철이라는 인간이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