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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Sep 11. 2024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

뿌연 안갯속에 있는 처럼 보이던 것들이 향미의 눈앞에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들이민다. 상황 분석이 또렷해질수록 선명함으로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향미는 기분이 더럽게 씁쓸하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을까. 무철을 무색무취 인간으로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안심했는데 이번에도 향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애초에 무색무취라서 더 의심을 했어야 했다. 바보처럼. 아니지, 냄새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명명백백하게 알아채는 향미의 특성상 무색무취라는 것에 너무 특별한 무게감을 부여한 것이 문제였을 수도. 무철에게 향미가 또렷하게 맡았어야 하는 냄새는 배신 그리고 음흉함 그리고 사악함 같은 것이어야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리고 돌이켜 보니,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니 그랬다.     


고요한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향미는 생각에 잠겼다. 인섭이 참관했다는 테스트 그리고 지금 향미가 지나고 있는 광장의 고요함.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무철의 계획이었다. 무철은 [BREATH] 공포를 만드는데 향미의 능력을 이용하고 그 제품을 테스트하는데 인섭을 이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이용해서 더 크고 더 나쁜 일을 벌이고 있다.


이걸 통해 무철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향미는 무철에게 향하는 여러 개의 물음표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애쓴다.


나는 이 일의 공범인가.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어디까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무엇보다 나 스스로 이 일에서 떳떳할 수 있나.       


한 개의 질문을 던지자마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향미의 발목을 걸어 넘길 것처럼 어수선하게 쏟아진다. 나쁜 일을 하자는 무철의 제안을 승낙한 건 향미였다. 그리고 그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무철은 향미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함께 하자던 나쁘지만 재미있는 일에서 무철은 자기 멋대로 ‘함께’만 빼버리고 자기 혼자 재미를 보려 했다. 괘씸하게도 무철은 나쁜 일을 했다는 더러운 기분만을 향미 혼자 느끼게 해 버렸다. 이 모든 일이 무철의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라면 향미는 지석에 이어 무철에게도 이용당한 것이다. ‘이용’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누가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것처럼 향미는 잠시 그 자리에서 멈춰 선 채 휘청댄다. 아래로 늘어트렸던 손을 움켜쥐는데 절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주먹 쥔 손을 그대로 두면 배신당한 자신의 우스운 꼴을 세상이 한눈에 알아챌 것 같아서 향미는 서둘러 주머니에 손을 짚어넣는다. 움켜쥔 손끝에 주머니 속에 있던 손수건이 닿는다. 낡은 면 손수건. 인섭에게 받아둔 무철의 손수건이다. 이걸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만나야겠다는 향미의 연락에 무철은 순순히 알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냥 버리고 말 손수건은 아닌 모양이지. 향미는 자신이 손수건만도 못한 신세가 된 것 같다는 더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이미 회사에 사직서를 낸 후다. 인수인계랄 것도 딱히 없이 며칠 후면 향미는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회사를 그만둘 터였다. 별안간 회사 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마무리도 이렇게 별안간 이루어지게 됐다. 이로써 더 이상 SM물산의 소속이 아니게 될 테고 앞으로 무철이 벌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쁜 그 일에서 향미는 발을 뺄 거다. 발을 뺀 다음일이야 뭐, 될 대로 되라지. 더 이상 향미가 신경 쓸 일도, 향미의 책임도 아니다. 무철을 만나면 이 모든 일이 끝난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선 향미는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무철의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소파와 식탁과 그리고 스텐드로 자리를 옮기며 향미는 손가락 끝으로 물건들을 천천히 훑는다. 이제 이곳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절로 물건들에 손가락이 갔다. 향미는 자신의 몸을 기쁨으로 떨게 했던 무철의 손과 지금 무철의 물건을 훑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나란히 겹쳐본다. 손가락 끝으로 물건과 그리고 무철의 손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은 향미는 이불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향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친다. 과거에 묻어둘 기억들. 침대에 벌러덩 누운 향미는 한동안 천장을 뚫어져라 본다. 


네 개의 번호 그리고 이어서 세 개의 번호.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기계음이 들린다. 곧 무철이 들어오겠지. 이제 향미가 묻고 무철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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