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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저 킴 Oct 09. 2022

추수감사절, 여왕폐하는 영원히

X키를 눌러 조의를 표하십시오

10월 둘째 주 월요일은 캐나다 추수감사절.


오랜만의 연휴기간을 앞둔 산뜻한 금요일 오후.

회사로부터 기묘한 메일을 받았다.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추수 감사절을 보내세요' 라며,

메일 마지막에는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영국 여왕 죽음에 대한 애도를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한 지 한 달이 다되어 간다.

캐나다는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를 지나 자국 자치령이 창설된 이후에도 영국의 영향을 크고 작게 받고 있다.

대표적 예로 모든 이민자들은 캐나다 시민권 취득 시 영국 여왕 및 왕실과 왕위 계승자들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만 한다.


캐나다 총리는 9월 19일을 여왕 서거에 대한 애도의 날로 제정, 공휴일 선포를 했다.

(안타깝게도 임시 연방 공휴일로 제정되어, 연방 관공서 등만 쉬었다, 나는 다름없이 출근했다.)


없던 공휴일을 만들고,

기념식에 군대가 행진하고,

대학은 성명서를 발표하며,

회사는 한 달이 지난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라며 단체 이메일을 보낸다.


마치 캐나다라는 나라가 모든 국민들에게

여왕이 떠나셨다, 그대들은 슬퍼하라! 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지난 한 달 동안 여왕의 죽음을 애통하는 이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아니,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별 관심 없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 같다. 일단 나부터 이 땅에서 1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지만 여왕님의 죽음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류 공동체로서 한 인간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여느 누구의 죽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니...


이렇듯 강요인 듯 강요 아닌 강요 같은 애도의 물결을 보고 있자니 한참 전에 유행했던 밈이 떠올랐다.


'X키를 눌러 조의를 표하십시오'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짤

수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슈팅 게임 시리즈가 만들어낸 밈이다.

전사자 추모에 대한 슬픔과 감동의 감정들을 게임 안에 욱여넣으려 했던 연출로

그 억지스러움과 우스꽝스러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요즘 뜨겁게 불붙고 있는

군주제를 폐지하느냐, 존속하느냐 

같은 논쟁에는 나의 얕은 식견으로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슬픔의 감정과 애도의 마음을 부추김 당하는 것만 같은 상황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저 게임 오래전에 사놓고 아직 엔딩을 못 봤네

이번 연휴 동안 열심히 정주행 하다 보면 다 깰 수 있으려나.


아, 물론 X키를 눌러 조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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