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어본다 32: <Big>(빅)
<Big> Vashti Harrison 2023 Little Brown and Company
팔다리에 살이 토실하게 오르며 자라는 아기는 이 세상 최고의 축복이다. 사람들은 이 경이로운 모습에 즐거워하고 아기를 칭찬한다.
'아이고 잘 크네.'
옛날 어른들은 이런 말도 조심해서 한다, 우주의 나쁜 기운이 혹시라도 이 축복을 질투할까 봐서. 그만큼 쑥쑥 잘 크는 아이들은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 큰 아이가, 그 몸의 크기가 더 이상 축복이 아닌 때가 온다.
매우 일찍 온다. 아마도 잘 큰 아이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 1학년 정도 그때가 바로 그 때다.
우리의 분홍이는 밥도 한 그릇 뚝딱 잘 먹어 몸이 쑥쑥 자라고 이렇게 몸이 건강하니 심성이 안정되어 즐거운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 들으며 컸다.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발레리나 인형을 좋아하고 자기도 무용복을 입고 발레반에 다니던 분홍이가 슬 슬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두드러지게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발레 연습복들이 자신에게 살짝 끼인다는 불편감을 느끼게 된다.
'이거 뭐지?'
무엇인가, 세상 거리낌 없던 지난 시절과 비교되는 자잘한 당혹감을 분홍이가 느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단순한 개인적인 당혹감이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이후 분홍이의 세계는 완전히 변한다.
아이의 일상에서 이런 사건은 대체로 어떻게 벌어질까?
우리의 작가, 바쉬티 해리슨(Vashti Harrison)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조우하는 '시스템과의 부조화'를 놀이터의 유아용 그네를 빌려 표현한다.
분홍이는 여늬 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터에서 튜브처럼 생긴 그네를 타며 즐겁게 논다. 그런 후 그네에서 나오려는데 그네에 꽉 낀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주변 사물이 자신의 몸에 잘 맞지 않는 듯한 개인적인 불편함이 있어왔는데 마침내 시스템이 자신에게 '넌 여기 맞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사건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그것도 친구들이 다 지켜보는 놀이터에서 공개적으로.
'씩씩하게만 자라다오'의 추임새에나 어울릴듯한 어린 분홍이에게 "시스템"이 "공개적"인 "압박"을? 분홍이에게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말들이지만 사실이 그대로다. 분홍이는 이미 이 사회의 일원으로 그 규범의 혹독함을 자신의 특정 상황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눈에 뜨이기 쉽게도 분홍이의 특정 상황은 그가 친구들에 비해 몸집이 제법 크다는 것이다.
혼자 힘으로 그네에서 나올 수 없으니 선생님이 달려오고 그네를 반 해체하듯이 하여 겨우 분홍이가 빠져나오자 선생님은, "이 그네 타기에 네가 너무 크다는 것을 몰랐어?"라며 그녀를 나무라는 듯하다.
잘 큰 자신이 더 이상 축복의 대상이 아니며 사회 시스템은 자신의 열외적인 사이즈를 거부한다는 것을 분홍이는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분홍이는 자신이 더 이상 분홍이가 아니라 '그네'라는 단어를 붙인 해괴한 이름으로 불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모든 사물이 자신의 크기를 지적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발레복은 맞는 사이즈가 없고 교실의 책상은 다리에 끼인다. 그리고 더 무섭게도 이 시스템의 거부는 더 이상 물리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반 친구들이 같이 꾸미는 발레 무대에서 모두들 꽃이 되고 싶어 하고, 또 되었지만 분홍이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너무 커 꽃이 아니라 산과 구름 모양을 붙인 복장을 입고 무대의 배경으로 만들어진다. 적절하게 작은 꽃이 아닌 너무 큰 꽃은 어린 분홍이들의 귀여운 발레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네도 책, 걸상도 아닌 '적절하게 작은'이란 이름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시스템에도 분홍이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놀란 분홍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을 피해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도망가는 것뿐, 스스로를 보호하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자신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분홍이는 스스로를 가둔 도피의 공간 속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역시 어릴 적에 잘 먹고 건강하게 자란 마음과 몸의 힘인지, 분홍이는 압박해 오는 공간에 굴복하지 않고 자력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나온다.
바쉬티 해리슨은 <빅>으로 2024년 칼데콧상을 수상했다. 좋은 삽화에 수여하는 이 상의 수상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삽화적 시도를 꼽는다면 바로 분홍이가 이 차단의 공간에서 나오는 모습의 처리일 것이다.
작가는 분홍이가 갇혀있는 공간을 두 페이지 펼침을 사용하여 묘사하면서 양 페이지를 두 겹으로 접은 겹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분홍이가 막힌 공간에서 탈출하는 모습은 접힌 페이지를 펼치고 나와 버리는 "단순한"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개인을 압박하는 고립의 공간을 거부하고 그 벽을 허물고 나오는 명확하고 쉬운 방법과 그 의의를 삽화로 제시한 것이다.
삽화 방법상의 예상을 깨는 (think ouside the box) 시도이면서 동시에 중의적으로 시스템의 억압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법, 적극적인 거절의 가능성을 이 삽화가 시사하고 있다.
'옥죄어 오는 사방의 벽을 거부해. 그냥 밀고 나오면 돼, 분홍이 답게. 부수거나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아닌 것은 아니니까 확실하게 거절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앞으로 분홍이가 어떻게 이 시스템 속의 수많은 튜브그네를 초월하며 살아갈지를 이야기하자면 새로운 책이 한 권 더 필요할 것인데, 심신이 건강하게 자란 분홍이가 다시 통념을 깨는 방법을 제시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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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4 Jane. (삽화 Copyright 2024 m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