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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인간을 위로하는 방식

아름다운 풍경에 맺힌 인간의 근원


제주도에 내려와 연세를 살다 보니 거의 매년 다른 곳으로 이사를 다녔었다. 첫 입도를 사라봉 근처에서 시작해서 애월, 한경, 남쪽 표선을 거쳐 성산에 이르렀다. 유랑민의 삶 같기도 하지만 나는 살고 싶은 곳에 이르러 아름다운 저수지나 목장 근처나 바다가까이에 살며 매해 아름다운 풍경의 수혜를 입었다.

애월에 살았을 때에는 저수지 근처에 전원주택을 얻어서 벚꽃나무가 둘러진 저수지둘레를 풀벌레소리 들으며 산책하였다. 정오에 수면에 닿은 수많은 윤슬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던 나의 마음을 불러 세워 한참 동안 너울거리는 빛의 감촉을 수혈하게 했다.

늘 조용한 동네로 이사를 다니다 보니 자연 속에서 산책하는 일 자체가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는 수행 같았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이 며칠 동안 발에 밟히여 몸 안에서 잔류하고 있을 때면 나의 생각과 몸은 쉽게 게으름에 빠지거나 무기력함을 느꼈다. 나는 그때마다 조용한 동네길을 걸어서 명료한 의식이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환기시켜 주길 바랐다. 걸을때마다 마주치는 자연의 소담하고 정감넘치는 풍경들은 내면을 안정적이게 돌보며 흔들리는 바람의 잎들 사이사이에 터져나오는 은근한 빛들은 머리와 몸을 감싸고 전 존재의 시간이 치유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보도블럭틈에 겨우 살아낸 민들레꽃을 주시하며 잠시 나의 쉬고 싶은 마음을 포개던 삶과는 달리 제주의 텅빈 공간과 드넓은 초록 대지는 빽빽한 공간의 중첩사이에서 위축된 사유에 보상하듯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마음은 텅 빈 공간을 마주했을 때 사유의 확장과 함께 활기를 얻는다. 초록의 대지위에서 흘러가고 흘러드는 대지의 기운이 빛과 결정체로 이루어진 순간의, 아름다운 풍경에 너울졌을 때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자연의 아름다운 빛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한다.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나 되었다는 느낌 안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건네주는 빛의 반사를 통해 자신의 근원을 비춰보는 절대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 안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독려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숭고함이다. 세계를 이룬 아름다운 생각이 자연 앞에 인간을 계속해서 머무르게 하고 머뭇거리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요청하며 자아는 그 요청받은 것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의 완성을 통해 세상에 드러낸다.

자연과의 깊은 유대감은 인간이 지닌 몸과 마음을 통과해 한 개인의 뜻과 이상으로 발아한다. 때로 그 사람을 이룬 아름다운 빛에 뒤돌아보게 되는 것은 세계를 떠돌다 멈춰 서서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무한한 경이로움에 세계와 한층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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