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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셋이 모이면 서울 역세권 아파트에 살 수 있다

비건 셰어하우스 만들기 4화

by 현주

저 같은 비건이 한 명쯤은 더 있지 않을까요?


돈이 아무리 없어도 좁디좁은 원룸에서 혼자 살기 싫은, 차라리 넓은 집에서 친구와 함께 살고 싶은 사람. 이왕이면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한 비건과 살고 싶은, 그래서 비건 쉐어하우스가 필요한 사람이요.


인스타그램에 이 소식을 공유했고, 연락이 꽤 왔어요. 그중 일정이 맞는 셋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새벽에 파바박 써서 올렸어요, L에게 집을 구하라는 말을 들은 그날.



공통점이 많았어요. 본가에서 가족들이 고기를 먹는 모습이 불편하고, 비건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비건 음식만 먹으며 살고 싶은 우리.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들 진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 아나운서 준비생, 해외 스튜어디스 퇴사자, 지방에서 서울로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활동가,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만들려는 저.


돈도 직장도 없는 우리가 과연 집 다운 집을 구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걸 알게 되었거든요


비건 셋이 모이면
서울 역세권 아파트에 살 수 있다





5. 성산동 G아파트(L부동산)

1.2억/150, 방3, 화장실2, 25평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쓰셨어요? 입주 청소 안 해도 되겠어요!"

우아한 퍼코트를 입은 집주인은 직접 청소한 보람이 있다며 기뻐하셨어요. 집안 곳곳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셔요. '이 방은 제가 명상하는 곳인데 채광도 바람도 잘 들어요.', '여기는 저희 아버지가 지내던 곳인데 안에 화장실 있죠? 지금 벽 닦고 있어요. 제가 지저분한 걸 싫어해서.' 사랑받은 집은 태가 나요. 이런 잘 가꿔진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근저당 말소 안 하는 조건이요. 대출 금리가 워낙 싸서 말소를 안 하고 싶으시대요. 중개인 두 분이 호언장담하셨죠. 선대출이 있어도 빌라가 아닌 아파트고, 그래서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고, 만약 경매로 넘어가더라도 집값이 3억 이하로 떨어질 리는 절대 없을 거라고.


사실, 월세 150이 부담돼서 보증금을 올리고 싶었거든요. 대출 이자에 관리비까지 합하면 인당 60-70은 우스우니까. 그랬더니, 부동산 사장님 왈 ‘알겠지만, 임대인이 여유 있어 보이지 않나요?’ 캐나다 살며 여행 다니는 사업가시래요. 부모님 지내시던 집을 부모님은 요양병원 가시고 세놓으려고 잠시 귀국하신 거라고. (아니 이런 부자가 25평짜리 집을 직접 혼자 청소했다니!) 아무튼 이런 분께는 ‘보증금 올릴 테니 월세를 내려주세요’보다 '월세 5-10만 원이라도 깎아주세요'가 더 나을 수 있다네요.


조건은 괜찮은데 쉽사리 "여기 할게요!"가 나오지 않았어요. 노란 장판과 체리몰딩. 아이보리도 베이지도 아닌 미색 수납장. 할머니집 같은 이곳에서 '꽃무늬 이불 덮고 푸데푸데 자는 나'는 상상되지만, '컴퓨터 앞에서 열일하는 나'? 상상이 잘 되지 않아요. 오히려 무기력해질 것 같았죠.. 우리가 괜히 까탈스러운가 싶었는데, 최근에 이사한 친구가 공감하네요. “아하… 그거 뭔지 완전 알지! 노란 장판 쉽지 않아..ㅋㅋㅋㅋ 생각보다 장판, 몰딩, 샤시 이런 게 영향이 커”





6. 망원동 W아파트(H부동산)

4천/150, 방3, 화장실2, 25평


현관문을 열자 밥 짓는 냄새가 퍼져요. 가습기가 포글포글 피어오르고, 베란다에는 차가운 타일 대신 나무색 데크타일과 러그로 장식된. 신혼부부와 갓난아기가 함께 사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이에요.


유심히 들여다보니, 창문에 블라인드가 쳐져있네요. 거실, 안방, 앞 뒤 베란다 모두요. 창 밖으로 아파트 화단이 보이는데, 지나다니는 사람 신발도 보일 것 같아요. 사실 여기가 1층이거든요. 이렇게 창을 다 가려야 할 정도면.. 여기서 살면 해를 못 볼지도 몰라요. 우울증 걸리기 딱 좋겠네요. 보안이나 안전도 걱정이 돼요. 아무리 아파트여도 1층이니까.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이런 아파트 살아요 우리, 대신 1층 말고 고층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어요.


집을 보고 나오며 중개인한테 보증보험 여부를 물어봤어요. "보증보험 되긴 되는데 누가 들어요!" 신경질적인 말투였어요. 혼자였다면 기세에 쫄았을텐데, 든든한 우리 편 예비 메이트들과 같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뭐야.. 이 사장님 되게 무례하네요', '그러니까요, 자기 자식도 바깥에서 똑같은 대우받길 바라나 봐요.' 처음 만난 사이지만, 이런 순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어요.





7. 합정동 H아파트(H부동산)

2.5억/90, 방3, 화장실2, 22평


나의 한남더힐 합정더힐을 다시 찾았습니다. 앞서 본 25평짜리 집들보다 살짝 좁고, 거실에서 "현주님, 들려요?" 하는 말소리가 방에서도 잘 들려요. 그래도 비세권에 속해 있고, 노란 장판도 아닌 모던한 느낌의 인테리어. 다들 이 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네요.


H부동산 사장님이 옆에서 부추겨요. W아파트와 H아파트 둘 다 괜찮지 않냐고, 그러니 둘 중에 하나 하라고. 집을 다 보고 헤어진 지 1시간 뒤에는 전화가 와요. 얼른 결정하라고. 그래도 등기부등본은 떼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인터넷 등기소에서 열람을 했는데. 이럴 수가! 우리 보증금보다도 많은 근저당이 잡혀있어요. 사장님은 융자가 없다고 했는데?


H사장님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봤어요. 그제야 집주인이랑 다시 전화하고는, '얼마는 갚았고, 남은 건 1억 2천인데 말소조건으로 계약 가능하다'고 전하네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근저당 여부를 확인도 안 하고 중개하는 중개인. L사장님은 등기부와 건축물대장을 직접 떼서 파일까지 보내주셨던 터라, 비교가 되었어요. 몇 분 뒤에, 전화가 다시 와요. "혹시 보증금 3억에도 가능하세요?" 중개인도 집도 너무 싸해요. 설마.. 전세사기 치려는 거 아니야? 합정더힐이고 뭐고, 바로 손절.


덕분에 피해야 할 중개인 체크리스트가 생겼어요.


✅ 매물을 보여줄 때 불성실하게 설명함. 특히 중개 중에 다른 업무 통화를 많이 함.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음.
✅ 적은 보증금은 푼돈으로 여김. 사회초년생이라고 은근히 깔봄. 보증보험은 몇 억 되는 거나 가입하는 거라고 함.
✅ 네이버 부동산, 직방에 올라와있지 않은 매물도 많이 보여줌. 문제는 ‘내가 보여준 거 다 괜찮지? 그러니까 이 중에 선택하면 되겠네’ 빨리 결정하라고 독촉함. 매물을 보는 중에도 부추기고, 헤어지고 나서도 연락 옴.






이 날은 하필 올겨울 가장 추운 날.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뻗었어요. 좋은 집을 찾은 줄 알았는데 사기일지도 모른다니. 더 지쳤어요.


'집 구하기 너무 힘들어요… 더 찾아봐야 할까요?' - 이 소식을 들은 인스타그램 친구들은 하나같이 말해요.


"더 찾아봐야 해!"

"맘에 드는 게 아니라 앗 여기다!!! 하는 느낌이 들어야 해."

"하루이틀 살 것도 아닌데 한껏 까탈스럽게 봐야지 어째~!"


결국 더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3월에는 매물이 더 안 나올 거라는 부동산 사장님 말에 조급함을 느끼긴 했지만서도 내가 찾는 거 하나쯤은 기다리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같이 다녔던 예비 메이트들과는 조건이 맞지 않았어요. 저는 위치가 더 중요했고, 누군가는 아직 독립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월세가 더 중요했죠. 만나기 전에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안 한 건 아니고, 집을 직접 보면서 각자 뭐가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어요.


또, 내가 미처 놓쳤던 부분을 서로 체크해 주고, 이상한 중개인은 같이 욕하고. 임장을 같이 다닌 건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집도 메이트도 처음부터 다시 구해야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비건 셋이 모이면,
서울 역세권 아파트에 살 수 있다.




예산에 맞는 아파트 세 채를 직접 보니까

아파트, 혹은 아파트만큼 좋은 곳에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처음으로 집을 직접 구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가장 먼저 자금 조달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지, 어떤 대출을 받아야 하는지, 은행에는 언제 가는지, 집을 볼 때는 뭘 봐야 하는지, 근저당은 어떻게 확인하는지 등. 이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찾았을 텐데요.


그렇다면, 비건 셰어하우스를 만들기 위한 완벽한 집 구하기 방법은?


집 구하는 왕 초보를 위한 A to Z 가이드, 그리고 제가 계약한 집 이야기를 다음 화에서 공개할게요.


꼭 셰어하우스가 아니더라도 자취방 구하는 프로세스도 비슷하니까, 첫 독립을 준비 중이신 분들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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