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탔던 곳은 3년 전 도쿄였다. 그곳에서 일본어 학교를 다녔던 게 계기였다. 첫 학기는 전철을 타고 통학했다. 학교가 있는 시부야역은 9개의 노선이 통과하는 복잡한 환승역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출구로 이어지는 긴 지하통로는 출근 시간에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여러 노선의 전철에서 동시다발로 내린 사람들의 행렬은 엄청났다. 검은 복장 일색에 우산을 손에 쥐고 전철역사의 인조석 바닥을 행진하듯 걷는 무표정한 도쿄인들. 그들에게서 6.25 전쟁 때 인해전술로 남한을 내려왔다는 중공군(당시는 중국을 중공이라 불렀다.)의 일사불란한 모습이 겹쳐졌다. 공포스러웠다. 맞은편에서 몰려오는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에 부쳤다. 30여 년 전 구로동에 있는 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능곡에서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혼잡하기로 악명 높은 신도림역에서 내렸는데 출근길 아침마다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느라 홍역을 치렀다. 하루의 기운이 이미 소진된 채 회사에 들어섰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날마다 벌어지는 출근 전쟁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도쿄의 보행 도로는 넓고 평평해서 자전거 타기가 수월했다. 주택가 골목에는 집집마다 문 앞에 자전거가 서있었다. 한 집에 서너 대가 있는 걸 보며 그 집의 식구 수를 짐작하기도 했다. 내가 살던 맨션의 자전거 주차장은 지정된 자리가 있어 편했는데 주차료를 받았다. (하긴 마트에 있는 거치대도 돈을 내야 했다.) 땅값 비싼 도쿄라는 실감이 났다. 일본어 회화 수업 중에 상황에 대응하는 표현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상황: 주민 A는 맨션 입구에 서있는 자전거를 발견한다. 그는 새로 이사 온 B가 자전거 주인임을 알게 된다. 대응: A는 B에게 출입문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면 안 되는 이유를 완곡히 설명. B는 A에게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기. 수업의 포인트는 공손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전달하기였다. 그 예시가 자전거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니 일본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날 아침도 나는 학교를 향해 집을 나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전거 앞쪽에 달린 바구니에 가방과 휴대폰을 넣은 다음 자전거에 올라탔다. 집 근처 유치원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있었다. 아이랑 걸어서, 자전거에 태워서. 주로 자동차나 스쿨버스로 등교하는 한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여유롭고 정겨운 아침 동네 풍경이었다. 6월인데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습한 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어느 순간부터 이어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신 장애로 연결이 끊어질 때가 있어 그런 가보다 했다. 신호등이 있는 곳까지 계속 달렸다.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바구니 안을 살폈다.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가방은 있는데 휴대폰이 없으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사라진 휴대폰도 문제였지만 휴대폰 케이스에 꽂아 둔 신용카드를 쓰지 못하는 불편함을 생각하니 난감했다. 하필 나는 다음 날 서울로 갈 예정이었다. 파출소에 신고를 하는 게 우선일지,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장소로 가야 할지, 파출소는 어느 파출소가 가장 가까운지. 갖은 생각을 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달렸다. 내리막 길 먼발치에서 어떤 여성이 서성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혹시???’ 낯익은 휴대폰 케이스가 내 눈에 줌인되어 들어왔다. 땀에 젖어 비 맞은 생쥐 꼴로 그녀 앞에 섰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길에 휴대폰이 떨어져 있기에 주웠는데 파출소로 갈까 하다 좀 기다려 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바구니 틈새로 전화기가 빠진 것이었다. 족히 15분은 기다렸을 것이었다. 연신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하며 내 사정을 설명했다. “지금은 학교를 가야 해서요. 서울을 다녀오면 꼭 답례를 하고 싶어요.” 몇 번 사양하던 그녀는 핸드백에서 영수증을 꺼내 뒷면에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주었다. 아이를 유치원에 바래다주고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추스르고 숨을 고른 뒤에 가방 주머니 안 깊숙이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다시 학교로 향했다. 지각이었지만 운이 억수로 좋은 날이었다.
올 9월 아들을 보러 미국에 다녀왔다. 아들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살다가 몇 달 전에 바로 옆 도시 산마태오로 이사를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버스나 전철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시였다. 반면에 산 마태오는 자동차가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아들은 얼마 전에 차를 샀다. 내가 온다고 서둘러 산 것 같았다. 녀석이 밥벌이를 시작하고 처음 마련한 차였다. 아들의 성화에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해 왔지만 운전대를 놓은 지가 몇 년 되어 자신이 없었다. 아들이 자기 차를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아들에게는 자전거가 있었다. 동네 돌아다니기는 안성맞춤이었다. 타려고 보니 바퀴에 문제가 있어 수리점에 들고 갔다. 주인은 부품이 없다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수리점에서는 중고 자전거도 팔았다. 보름 정도 탈 거라고 하니 아일랜드계 주인아저씨는 한 달 내로 가게로 가져오면 반값에 사겠다고 했다. 따져보니 빌리는 값과 비슷했다. 몇 대를 시승해 보고 그중 하나를 골라 샀다.
자전거로 다니겠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헬멧 착용이 의무였다. 자전거 운전자는 차도로 다니면서 자동차 교통규칙을 따라야 했다. 빨간 신호에서 달리면 불법이었다. 동네 마실 다니는데 헬멧을 써야 한다니, 번거로왔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이방인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 당할지 모를 도난을 대비하는 방책에는 반감이 들었다. 아들 말로는 자전거를 그냥 길에 세워두면 훔쳐간다고 했다. 바퀴와 몸체를 같이 묶지 않으면 바퀴마저 빼간다며 겁을 줬다. ‘아니 세계 초일류국가답지 않게. 인도도 아니고…’ 바퀴 묶는 케이블과 자전거 채우는 자물쇠를 내게 건네주는데 할 말을 잃었다. 부피도 컸지만 5킬로는 될 정도로 무거웠다. 가상의 도둑 때문에 쇳덩이를 지고 다녀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탈 때마다 자전거를 묶고 푸는 것도 일이었다. 나는 재택근무로 삼식이가 된 아들에게 집밥을 해서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코 앞의 마트를 가려해도 자전거 자물쇠부터 챙기는 게 번거로워 몇 번 타다 말았다.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오는 한국의 청과물 총각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아들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에 같이 자전거로 해변을 달리며 저무는 해를 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주말에 아들과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갔다. 아들은 차를 주차할 때마다 주위를 살피며 안전한 도로인지 확인했다. ‘별나네.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유난 떠는 아들이 못마땅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하필이면 주차하고 몇 발짝 가니 길바닥에 차창유리 파편이 널브러져 있있다. 누군가 차의 창문을 깨고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아들은 의기양양하게 “이렇다니까, 내 말이 맞지?”했다. “ 헐!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냐, 넌?”
일본의 공공요금은 비싸다. 택시비는 한국의 두 배 이상이고 버스와 전철은 환승이 안된다. 모두 민간 주도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막으로 자전거 천국의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나름 생각했다. 세계 경제를 이끄는 미국. 하지만 좀도둑 때문에 자전거도 맘 편히 못 타는 미국 도시민의 모습은 짠해 보였다. 자전거 우선도로에서 앞서 달리는 자전거를 향해 빵빵대거나 신경질적으로 추월하는 자동차를 살펴야 하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보행자도로의 보도블록을 조심조심 다녀야 하는 나라. 그래도 자전거에 자물쇠를 걸지 않고 길에 세워둘 수 있는 나라. 이 정도면 우리나라, 뭐, 자전거 타기 괜찮은 나라인 것 같다. (2021.11.21)
#자전거#도쿄#산마태오#샌프란시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