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를 입양하기 전에 잠깐이나마 다른 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은 아들이었다. 어느 날 아들과 마리 이야기를 하다가 ASPCA와의 인연이 생각났다. 아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일을 깡그리 잊고 살았을 것이다.
2000년 휴스턴으로 이사 와서 얼마 후에 ASPCA에서 개를 입양했다. 아파트 안에서 개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집안이 전부 옅은 색의 두터운 카펫으로 깔려있었는데 부엌과거실할 것 없이 바닥에 수시로 용변을 보는 강아지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ASPCA에 개를 돌려주었다. 말하자면 파양을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몹쓸 짓을 했다. 동물을 사랑하고 보살피며 가족으로 여긴다는 ‘애완’의 뜻을, 좋아하는 장난감 ‘애완’쯤으로 가볍게 생각하여 쇼핑하듯 개를 산 다음 마음에 들지 않자 반품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그일을 무심히 여겼단 뜻이다.
ASPCA의 정식명칭은 ‘American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이다. 개를 입양할 수 있는 곳이라고만 여기고 무슨 약자인지 알아볼 생각을 못하다가 이 기관의 이름이 ‘동물 학대 방지 협회’라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1866년에 설립된, 하얀 바탕에 밝고 맑은 파란색 글씨의 로고가 미국 어디를 가도 한눈에 띄는 동물보호기관이다. (내가 미국을 떠난 2005년 이후에는 새로운 색깔로 바뀌었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 금지법이 1964년에 통과된 것을 생각하면 동물 보호가 흑인 권리보다 우선시된 셈이다. 당시 동물권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이 놀랍다.
중동의 카타르에도 유기견을 보호하는 센터가 있었다. 주로 카타르에 일을 하러 온 외지인이 데려와서 기르다가 버리고 간 개를 보살피는 쉘터였다. 고등학생이던 아들은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우리에 갇힌 개를 산책시키고 내부를 청소하는 자원봉사를 했다. 영국인 부부가 사비로 지었다는 유기견 보호센터는 일반인의 후원과 자원봉사로 유지되었는데 환경이 열악했다. 섭씨 4,50도를 넘나드는 날씨 속에 철장에 갇힌 개들은 무기력하고 슬퍼 보였다. 길에 돌아다니다 변고를 당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겠지만, 밥은 보장되나 자유가 없는 철장 속의 생활을 생각하니, 선택권이 없는 개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림프암을 앓던 마리(미국에서 데려왔다)가 카타르의 열기 속에서 몇 달을 버티다 세상과 작별을 했다. 마리가 죽기 전 아들은 유기견 보호센터에 마리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싶다는 부탁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 센터 구석의 빈 땅에 시신을 종이 상자에 담아 묻고 작은 십자가를 세워 그 짧은 생을 기념했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카타르에 살면서 그리스의 아테네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편평한 바위산에 우뚝 솟은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아테네시와 함께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길거리의 개들이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거리에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고 개들이 떼를 지어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으나 가는 곳마다 공터에 자리 잡은 개들에게 곧 익숙해졌고 도시의 일부분처럼 여겨졌다. 미동도 없이 마치 독한 감기약을 먹은 양 축 늘어진 개들은 사람들이 다가가도 꿈쩍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아테네 유기견들이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내가 사는 집에서 오 분 정도 걸으면 산길로 통하는 샛길이 나온다. 샛길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곧장 산길로 연결된다. 거리가 짧고 가팔라 뱃살 빼기에 도움이 될까하여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샛길과 언덕 사이의 연두색 철문에는 빗장이 쳐있고 손소독제가 걸려있다. 산에서 개들이 내려올 수 있으니 빗장을 반드시 걸어달라는 부탁문구가 적혀있어 문을 열고 나면 빗장걸기를 잊지 않고 실천한다. 사람들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아직까지 산이나 길에서 개를 만난 적은 없다. 유기견은 개장수가 잡아간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유기견은 보기 힘들어졌으나 길고양이는 가끔 보인다. 자기 구역이 있는지 어떤 특정한 곳을 지나갈 때마다 눈에 익은 검은색에 꼬리가 짧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다. 그림처럼 앉아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젊은이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한참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뜨지 않는 그들의 마음과 뒷모습이 예뻐서 자꾸 쳐다보게 된다.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을 집사라 한다는데 그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다들 교회에 다니는 줄 알았다. 이삼십 년 전에 비하면 고양이를 기르는 집들이 많이 늘어난 듯하다. 고양이는 일본사람들도 좋아하는 반려동물이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고양이에 관한 내용이 많다. 외로운 이에게 고양이를 빌려주는 어느 여성에 대한 영화, 엄마가 하던 식당을 물려받아 꾸려가는 딸이 식당 앞에서 길냥이를 발견하고 데려다 키우는 소소한 영화도 있다. 일본의 상점에 가면 ‘마네키 네코'(복을 부르는 고양이)' 인형을 입구나 계산대에서 볼 수 있다. 주로 한쪽 손만 쉬지 않고 위아래로 흔들며 손님을 맞이한다. 오른손을 흔들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왼손을 흔들면 돈이 들어온다고 한다. 행운과 번영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고양이 인형이라는데 쉴 새 없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내 눈에는 측은하게 보였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고양이 얼굴을 보면 도무지 그 마음 상태를 읽을 수가 없고 고양이의 눈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고양이 하면 순간적으로 미국 작가 에드가 알렌 포우가 쓴 <검은 고양이>의 음침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내가 개띠에다 단순한 성격이라 그런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짖어대고, 달려들고, 혓바닥으로 핥아대는 개에게 더 끌린다. 내가 아는 분 중에 길고양이를 돌보는 집사님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양이의 상태와 나이에 맞게 정성스레 조제한 밥과 물병을 잔뜩 들고 동네를 돈다. 물론 자비로 한다. 길냥이는 노숙자처럼 사는 환경이 안 좋으니 더 잘 먹어야 한다며 좋은 사료를 사서 먹인다. 고양이 돌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개인적인 일은 미루거나 포기하며 사는 것 같았다. 때로는 주위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으며 길냥이를 지키는 그분에게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 못 하는 동물이 불쌍해서.” 너무나 뻔한 답변이 돌아왔다.
동물 중에서 인간과 가장 긴 시간을 함께 살고 있다는 개와 고양이. 우리와 살기 전에는 야생으로 존재했을 이들은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길들여졌고 지금의 모습과 성격으로 변했다. 애완동물로 불리던 호칭은 언제부터인지 반려동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리 잡아 인간과 대등한 위치가 된 사실을 정작 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이 죽어 재산까지 물려받는 억세게 운 좋은 반려동물 뉴스도 가끔 나오는 것을 보며 바야흐로 반려동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한다.
인간 세상의 부조리만큼 반려동물도 누가 키우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게 안타깝다. 사랑과 보살핌을 받기도 하고 학대당하거나 버려지기도 하니 말이다. 누구는 가볍게 버리고 누구는 버림받은 동물을 데려다 정성스레 보살핀다. 나는 종교가 없고 내세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윤회설이 있다면 믿고 싶다. 복을 지으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죄를 쌓으면 개나 고양이로, 그것도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로 태어난다고. 지구에 사는 동물의 99퍼센트가 인간이라고 하는데 전재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같이 좀 보듬고 삽시다. (202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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