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빌라도는 로마법에 명시된 적법한 절차대로 재판을 진행하고 사형을 집행했을까? 법학자들은 당시 로마법의 견지에서 예수 재판 과정을 재평가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들에게서 서로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법학자이자 작가인 살바토레 사타가 지적하였듯이 모든 재판 하나하나가 제각각 어떤 '비밀'이라면, 이 비밀의 모순성은 예수 재판에서 유독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로마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를 판결하는 데 있어서 로마 행정관의 권한을 어디까지 부여할지, 그리고 그 범죄에 율리우스 법 (Lex julia: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 율리우스 씨족이 도입한 법률 모음으로, 주로 시민의 도덕, 결혼, 가족 가치를 규제하고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됨)을 적용할지, 하지 않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만장일치의 법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빌라도에게는 칼의 권리 즉 사형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에수의 처형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절차상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해석가마다 견해가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재판 절차가 어떠한 법적 형식도 갖추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예수의 재판에는 고소장도, 고소에 대한 정확한 접수도, 범죄 사실에 대한 확정이나 판결에 대한 명확한 공시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적인 견지에서 보면 '나사렛 예수는 사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의 처형은 <부당한 처벌이 아니라 살인>이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입장에 반대하여 로마법은 오직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예수와 같은 비-시민에게 해당 속주의 총독이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관할권이 아니라 징벌권이었지만, 여러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식정인 재판 절차에 구속되지 않는 경우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감벤은 로마법뿐만 아니라 유대법 전통에 대해서도 탁월한 전문가인 학자마저 이 재판 과정에 일관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한다. 로마법의 전문가인 피에트로 데 프란치시와 같은 학자도 예수의 재판은 전혀 정당성이 없다고 해석했다. 로마법의 지침에 따르면 속주 내 사건의 재판을 맡은 집행관은 군중의 목소리에 휘둘려서는 안 되며, 내란을 선동하는 자들은 엄하게 다르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한 자들은 분명 예수가 아니라 산헤드린(유대인 지도자 단체)이었다. 따라서 빌라도는 용기가 없어서 '법적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탈리아 작가 단테는 그의 유명한 책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지옥편] 3장 60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빌라도를 게으른 자들의 무리에 속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즉 빌라도는 '비겁함 때문에 책임을 회피한 자'였다. 이렇게 보면 성서에 관한 모든 해석에 내재한 애매성이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복음서를 역사적 자료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순수한 신학적인 문제들인가? 저자는 빌라도에 대한 해석 역시 한 층위에서 다른 층위로, 즉 <역사적 인물에서 신학적 형상으로, 법리 해석에서 구원의 경륜으로, 공허한 말의 거품에서 마음의 심연>으로미묘하게 이동한다.
한 층위는 다른 층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가령 세속의 층위에 속하는 비겁함, 게으름, 혹은 질투는 신이 계획한 구원의 경륜이라는 층위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현상 즉 빌라도의 망설임과 실수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굴복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어떤 해석가는 빌라도가 재판 질서를 어기면서까지 산헤드린과 교섭했던 것을 두고 '전략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실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해석자는 로마 재판법에 따르면 빌라도에게는 재판을 멈추고 휴정을 선언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에 대해 미심쩍게 생각한다.
이제 저자인 아감벤의 견해를 알아보자. 그는 해석학의 근본원칙에 충실해서 이 사건을 이해한다. 즉 빌라도가 모종의 신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오직 그가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그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신학적 기능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빌라도에게서) 역사적 인물과 신학적 형상, 법적 재판과 종말론적 위기는 완전히 합쳐진다.
오직 이 '합쳐짐 cadere insime' 속에서만 인물과 형상과 재판과 위기는 진짜가 된다. 아마도 아감벤의 빌라도 해석은 오늘날 현대 철학에서 쟁점이 되는 <층위의 겹쳐짐(Overlapping layers: 여러 층위가 중첩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 관계를 통해 세계, 사회, 존재가 형성되고 변화하는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