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수
70년대는 진학률이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많았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은 서울로 갔다. 마을마다 서너 명씩 되었다. 주로 제화점이나 중국음식점, 여자아이들은 봉제공장으로 갔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친구들은 명절이면 양손에 선물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마을 앞 정류장에 버스가 설 때마다 낯선 옷차림이 내리고 쭈뼛거리며 마을로 들어서는 작고 큰 몸이 보였다.
부모님은 추석에도 일을 했다. 벼를 베기 전에 도구를 쳤다. 논을 바짝 말려야 해서 물길을 내었다. 논두렁을 따라 두세 포기의 벼를 흙더미째 옮기며 물길을 만들었다. 물길 끝은 나중에, 추수하고 나서 모여든 미꾸라지를 잡았다.
막냇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넷째 동생은 아버지 등에, 셋째와 둘째는 오빠 손을 잡고 걸었다. 좋은가 보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메뚜기를 쫓다가 부지런히 돌아와 손을 잡고는 한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좋은 것을 하며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기수는 말없이 일을 했다. 아버지 역시 아무런 것도 물어 보지 않으셨다. 하긴 부모님은 더 이상 아들의 인생에 관여할 위치에서 벗어나 버렸다. 본인의 의지를 요구할 때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고향집은 더 이상 기댈 수 없다. 아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것도,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계실 거다.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들이 아버지를 외롭게 했다. 어머니와만 소통한 것 말이다. 주로 어머니와 대화했다. 물론 아버지랑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 기술이 없어 길게 말하는 것을 힘들어하셨고, 그럴수록 말하는 기회도, 자리도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가끔 하는 대화는 더 어색해서 더 안 하게 되는 악순환이 되었다. 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이라든가, 무뚝뚝한 겉모습만으로 보인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에서도 그랬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많이 죄송하다. 아버지가 되어 보니 아버지를 알겠다. 가끔 바라보던 눈빛 속에 정이, 말로 표현못하던 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 철은 늦게 드는지.
추석이라고 별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채 여물지 않은 고구마, 뒤란 감나무에서 얻은 홍시, 사과 몇 개, 집에서 키운 닭을 잡기는 했다. 오랫만에 술을 드시지 않은 아버지는 수줍은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시다 저녁이 되어 기어코 나가셨다.
저녁에 환승이 왔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환승 아버지는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결국 누나 둘, 환승, 남동생까지 초등 학력으로 집을 나갔다. 그러니 고향을 찾는 환승은 집보다는 기수에게 왔다. 서울에 가잖다. 누나가 있는 서울은 일자리도 많고 월급도 쎄다고 했다.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탔다. 오후 늦게 탄 열차가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이었다. 11시간 걸렸다. 추웠다. 고향에서 입고 온 얇은 잠바는 열일곱 소년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그런 사람들 속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는데 친구는 여유로웠다.
‘촌놈 쫄기는….’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여자가 다가왔다. 할머니라고 부르면 맞을 것 같은 나이였다. 환승이와 뭐라고 주고받는 말이 간간이 들렸다.
‘뭐가 그리 비싸’
‘잠만 잘 건데’
흥정이 끝났나 보다. 환승이 돌아보며 부른다.
‘야, 가자’
‘?’
‘뭐해 인마, 빨리 가자니까.’
친구를 놓칠까 봐, 혼자 남겨질까봐 가방을 들고 쫓아갔다. 역 앞 광장 옆으로 난 좁은 길을 한참이나 들어갔다. 허리를 구부려 들어선 집은 수많은 문이 마당으로 난 이상한 구조였다. 그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 소설을 읽으며 알았다. 그 방의 전등이 왜 붉었는지, 신발을 방에 들여놓고 문을 닫아야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환승은 익숙하게 코를 골았고, 기수는 가방을 붙잡고 앉는 것도 서는 것도 아니게 벽에 기대어 서울의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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