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수
아련함을 주는 것들이 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나온 메모장, 책갈피 속에서 찾은 어버이날 받은 편지, 뜻밖에 만나는 지명에도 아련함을 느낀다. 예전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 속 어떤 장면도 그렇고, 계절이 바뀌며 변화된 기온이 피부에 닿을 때도 아련함을 느낀다.
영등포, 양평동, 오목교, 난곡. 제기동, 신설동, 용두동….
서울이라는 말보다 이런 지명이 보일 때, 가을로 넘어가며 낙엽이 시작될 때 잠시 생각이 머물곤 한다.
그날 아침 친구는 떠났다. 여인숙에서 나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친구는 가버렸다.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삐 걸었다. 하지만 기수는 갈 곳이 기야 할 곳이 없었다. 가만 서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한가로우면 안되는 기분으로 걸었다. 큰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불안이 조금 사라졌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며 걸었다. 눈앞에 커다란 굴뚝이 보였다. 양평동. 어떻게 그곳을 갔을까? 본능이었을 것이다.
공원모집. 000명. 숙식 제공
무조건 찾아갔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이었다. 플라타너스가 조금씩 물들어 가는 경비실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침을 뱉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 담벼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 그렇게 다양한 사투리를 처음 들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작동했다. 노동자티가 역력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까 봐 조금 떨어져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공장 안에서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사람을 손으로 불렀다. 손짓으로 부르는데 누구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기수도 가방을 들고 쫓아갔다. 건물에 들어선 순간 고무 냄새가 코를 찌르고, 건너편 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시골 학교 교실보다 백 배는 커 보였다. 커다란 기계 사이에 수도 없이 많은 고무가 산처럼 쌓여 있고, 고무만큼 새까만 얼굴들이 보였다. 온통 까만 색깔이었다. 그들은 들어오는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중년 남자는 작업대마다 몇 사람씩 떨궈 놓고 가버렸다. 기수도 푸른 작업복에게 인계되었다. 얼굴이 강파르게 말라 무서워 보였다. 힐끗 쳐다보는 눈길은 더 불량스러웠다. 눈짓으로 턱짓으로 일할 곳을 배치했다. 어떻게 하라는 설명이 없는데도 모두 일사불란하게 작업에 돌입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공돌이들은 순식간에 공장의 한 부품이 되어 갔다.
어디서 그런 눈치가 생겼을까? 기수도 어느 순간부터 고무 덩어리를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오늘의 결정을 후회했다. 아니다. 강파른 작업복을 만나는 순간부터였다.
‘여기 오는 것이 아니었어. 오는 길에 보이던 다리(오목교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밑에서 자더라도 여기는 아니었어.’
푸른 작업복의 시선을 피해 바라본 공장 안은 개미처럼 많은 작업자들이 무표정하게 움직였다. 바구니에 담은 고무를 커다란 기계에 붓는 동작을 기계처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8.15 광복절이면 면사무소 지붕 위에서 울리던 소리가 공장에서 났다. 신기했다. 작업 종료 소리인가 보다. 고무를 삼키던 기계가 멈추고, 공장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기계에 들러붙어 빗자루질했다. 기수 손에도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어디에 있는 것을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과 똑같이 해야 했다. 기계와 바닥을 쓸고 닦는 모습이 인간기계 같았다. 모든 것이 기계처럼 돌아갔다. 청소를 끝낸 사람들은 수돗가로 몰려가 고무만큼 까만 비누로 부지런히 씻었다. 콧구멍과 귓바퀴에 달라붙은 덩어리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수도 그들을 따라 하고 있는데 푸른 작업복이 불렀다. 표정만큼 불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따 기숙사 뒤로 나와.’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렴풋이 들었던 불량스러운 일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신고식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 그렇게 해서 똘마니라 부르는 추종자를 다스리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만들어 가는 것. 오늘 기수가 그 희생물로 선택되었나 보다. 잠시의 혼동을 추스르고 떠오른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탈출해야 한다. 저 작업복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가장 사악한 인간이다. 저런 사람을 이길 자신은 없다. 도망가야 한다.
수돗가에서 씻는 척하다 공장 정문을 향하여 달렸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는 기수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공장을 벗어났는지 기억에 없다. 작업복이 쫓아 오는 것만 같았다. 뒤돌아보면 목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돌아볼 수 없었다. 뛰다시피 걸었다. 그 와중에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