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수
시내에 근무할 때는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운전하지 않는 즐거움, 꾸벅거리며 졸 수 있는 특권, 퇴근할 때 한 정류장 걸어가 타는 여유에 더하여 가끔 통닭 거리 들러 가마솥 튀김으로 사 들고 오는 재미도 누렸다. 무엇보다 설렌 것은 철공소 동네를 들렀다 오는 거였다. 코스를 조금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수원천을 따라 늘어선 철공소가 나왔다. 화성을 조성할 때 철물을 대면서 발달했다고 하는 구천동 철물 거리는 볼트, 공구, 목재 파는 곳도 있고, 용접, 쇠를 깎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낫, 괭이, 도끼가 있고, 바닷가에서 조개 캐는 기다란 호미도 수북이 쌓여 있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구경하는 것, 거기에서 나는 냄새에서 오는 아련함이 좋아 찾곤 했다.
쇠에서 나는 냄새가 좋냐고? 그렇지는 않다. 냄새가 가져다주는 추억이 좋았다.
열일곱 살 겨울을 용두동 철공소에서 보냈다. 양평동 고무 공장에서 나와 용두동까지 가는 여정은 뭐랄까 궁하면 통한다? 맞다. 아무 데서나 잠들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으로 걸었다. 한강 다리를 건넜다. 사람들이 보이면 바쁜 척 서둘다 멀리 사라지면 발걸음을 늦췄다. 커다란 야적장이 나왔다. 어둠 속에 파고들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깨어나는 두려움에 지나쳐 걸었다. 그렇게 낯선 동네에서 아침을 맞고, 또 다른 동네를 찾다 번개처럼 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추석에 고향을 찾은 친구가 장난처럼 말한 서울 오면 전화하라 하면서 가르쳐준 번호가 기적처럼 떠오르고, 공중전화 넘어 친구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신설동역에서 내리니 친구가 가르쳐준 간판이 보였다. 간현 식당, 제기 용달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대성 철공이라고 검은색 페인트 글씨가 보였다. 언제 열렸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녹슨 철문 아래 작은 문이 비스듬히 젖혀있고, 그 앞에 친구가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보였다. 그래도 반가웠다. 허리를 굽혀 들어갔다. 잠시 어둠이 익숙해지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득함 자체였다. 크고 작은 기계(선반이라는 기계였다) 옆으로 쇳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고, 기계 하나에 한 사람씩 앉아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네 사람 중에 누가 친구인지 금방 알았다. 잔뜩 구부리고 앉은 어깨만 봐도 내 친구였다. 불렀다. 돌아서 보는 눈빛이 흔들렸고 잠시 보더니 고개를 돌려 선반으로 파고들었다. 나만큼 반갑지 않나 보다. 나중에 얘기하길 고참 눈치 때문에 반갑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서른 넘어 보이는 형 둘, 친구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 또래 해서 모두 네 명이 전부였다.
막무가내라는 표현이 이런 경우일 거다. 단지 친구가 오라고 했을 뿐이다. 어쩌면 철공소 사장과 이야기가 되었을 거라고 '막무가내'로 믿었는지 모른다. 눌러앉았다. 가라고 해도 버텼을 것이다. 다행히 사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철공소 공원이 되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그냥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궁궁궁 돌던 선반이 멈추고, 흩어진 쇳가루를 쓸어 모으고 네 사람이 차례로 수돗가에서 씻고 돌아설 때까지 그냥 서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은 집으로 가고 두 사람은 다락으로 올라갔다. 철공소 지붕 아래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공간이 숙소라고 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다락 한쪽이 기수가 서울에서 몸을 눕히는 또 다른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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