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수
길옆 플라타너스가 다락 창문에 닿았다. 원래는 더 컸는데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싹둑 잘라버린 단면으로 잎이 무성하게 나왔다. 생존의 몸부림인지 크고 넓었다. 비 오는 날이면 잎에 튕긴 빗물이 다락으로 들어왔다. 철공소가 쉬는 날 하루 종일 창문에 붙어 손에 올려놓고 빗물받이를 하며 보냈다.
서울은 낯설다. 하늘의 별만큼 많은 집 중 어느 한 곳도 기수가 쉴 공간을 주지 않았다. 영등포에서 양평동을 거쳐 용두동까지 오는 동안 한시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멈추면 안 되는 것처럼, 하염없이 걸었다. 한강 다리를 건넜다 돌아오면 날이 밝아왔다. 길바닥 아무 곳에나 자면 안 될 것 같아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일부러 바삐 걸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걷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시간이 걸리는 길로 돌아 걷다보면 낮은 건물을 돌아 모퉁이가 공사장이다. 쌓아 놓은 자재 사이에 앉아 잠시 아픈 다리를 멈추고는 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간 공사장은 불이 환했다. 서울은 쉴 곳이 없다.
다락이라는 안식처가 주는 안도감은 표현할 수 없이 좋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먼지가 가라앉으면 냄비와 풍로를 들고 내려왔다. 납작보리 한 주먹을 끊인 죽에 라면수프를 풀면 훌륭한 맛이 났다. 철공소 형들이 낮에 새참으로 라면을 먹었다. 큰 냄비에 열 봉지가 넘는 라면을 넣고 끓이는데 수프 한두 개를 빼고 끓였다. 그렇게 남은 수프가 반찬이 되었다. 월급 54,000원 중 4,000원 이상 소비하면 안 된다. 종로에 검정고시 학원이 있다고 했다. 6개월이면 학원비를 마련할 수 있다. 철공소는 여섯 달만 일할 생각이다. 일단 학원을 등록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목적이 분명하면 다른 것은 하찮아진다.
체력의 중요함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나 느낀다. 책상에 앉는 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저녁을 먹고 다락으로 올라가면 피로와 즐거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피곤으로 무너지는 몸을 추스르며 영어 단어장을 넘기다 졸기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웠다. 가끔 수학 사전을 꺼내기도 했다. 수학은 더 짧은 시간만 집중하게 했다. 플라타너스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면 수학을 읽었는지 영어를 읽었는지 구분이 안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고 혼자인 기수에게 친구가 생겼다. 작업이 끝나고 선반에 쌓인 쇳가루를 쓸어내는데 한 아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에서 일하던 사람 같았다. 금송. 서해안 바닷가 마을이 고향이라고 했다. 쬐그만 놈이 담배를 피우는 것도 웃겼지만 막걸리를 마실 때면 꼭 담배 끼운 손으로 들고 마셨다. 나이가 같았다. 금송이와 금방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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