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수
사람이 직업을 선택할까? 직업이 우리를 선택할까?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저 일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즐겁게 일하고 소신껏 일하며 능숙하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안 어울린다. 저 사람이 왜 저기 있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는 한다. 물론 딱 맞게 어울리는 사람을 더 많이 본다. 그 일을 오래 해서 하는 일과 어울리게 보이는 걸까? 성향에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젊었을 때는 지금의 길이 내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소년기에 꿈꾸었던 길로 가야 했는데, 가정 형편 따라, 점수 따라 이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고. 문득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난 이 직업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하다 보니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아니면 나에게 맞는 직업이라 어울려 보이는 걸까. 초면인 사람이 ○○○이시죠? 라고 할 때는 기분 좋음보다 비밀을 들킨, 쉽게 간파당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기수와 대근, 춘호는 배달할 학습지를 챙겨 나란히 사무실을 나섰다. 배달처가 몇 집 되지 않아 금방 끝났다. 이제부터는 개척이다. 며칠 동안 두 친구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영업을 배웠다. 특히 춘호의 실력은 대단했다.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빼꼼히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을 들어 가면 성공이었다. 대단한 언변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내일부터 넣어 줘요.’라고 한다. 신기했다. 어떻게 어린 학생이 있는 것을 알고, 또 어떻게 말이 술술 나오는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마루 아래 신발만 봐도 초등학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단순한 비밀을 기수는 몰랐다.
며칠간의 수업이 끝나고 각자 구역을 정해 흩어졌다. 골목을 지나다 사람 소리만 들려도 고개를 들이밀고 학습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학생 없어요.’
‘안 봐요.’
춘호는 영업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기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일 뿐인데, 맞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의 기수가 그랬다.
2주째 한 건의 학습지도 개척하지 못했다. 비참한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가고는 했다. 지친 다리를 끌고 돌아와 사장과 왜 나오는지 이유를 알수 없는 사장 동생의 눈치를 보며 라면 한 그릇 먹고 또 거리에 나섰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부재로 인한 불안과 고립감이 되살아 났다. 돌이켜 보면 기수의 영업 성공률이 낮았던 이유는 갖고 있는 소극적인 성격에 더하여 입을 닫게 하는 사투리였지 싶다.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봐 입을 닫을수록 더더욱 말 없는 영업을 해야 하는 악순환이 되었다.
대근이와 춘호가 개척한 학습지를 배달만 하는 것으로는 사장에게 이익이 가지 않는다. 언제나 애매하게 웃는 사장이 춘호에게 그랬단다.
‘재는 버는 게 없어.’
배달보다 개척이 많아야 했다. 춘호와 대근이는 학습지 개척을 노는 시간으로 여겼다. 배달이 끝나고 영업을 하자고 우기는 기수를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린다. 혼자 남은 기수는 열심히 개척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을 끝도 없이 걸었다. 사람을 만나도 학습지 보세요라는 말을 못 하고 손에 쥔 학습지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학생, 여기 학습지 하나 줘요.’
라는 말에 손이 떨리게 주소를 받아 적는 경험은 한 달에 두 번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사장은 기수에게 가운데 구멍이 뚫린 토큰 두 개 외에는 주는 것이 없었다. 사실 그것도 고마웠다.
학습지 사무실을 가려면 화곡동에서 봉천동까지 버스를 두 번 바꿔 타야 했다. 토큰 네 개가 필요하다. 큰돈이다. 그래서 노량진까지 버스로 나오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봉천동 고개를 넘었다. 토큰 네개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반가워하지 않는 사무실을 열심히 나갔다. 눈치가 없을 만큼 궁박한 시간이었다. 쓰리고 아픈 그 시절이 나중에 삶의 자산이 되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