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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dovico Jan 11. 2024

어느 신경의학자 이야기

3화

구덩이에 빠진 사람

하나의 사건(원인)은 다른 사건(결과)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 간 관계를 인과라 한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라는 사건은 전세계 곳곳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국가를 늘려 이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가장 큰 포화의 중심이 되었던 서유럽, 그 중에서 영국은 전쟁이 발발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1940년 6월에 독일의 공군병력에 의한 폭격으로부터 런던을 지키는 공중전을 펼친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라 부르는 독일의 이 공격 시도는 도시의 역사성과 삶의 터전, 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모든 것의 파괴를 시도한다.


이로인해 당시 영국 정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린이들을 보호해야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런던과 양육자의 곁을 떠나 지방의 기숙학교에 맡겨져 생활하게 된다. 아이들의 안전 하나만을 위해서, 하루 아침에 어린시절의 안정이 가득한 도시인 런던과 집 그리고 주 양육자 등 모든 관계에서 단절하여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떠난 어린아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런던 시내에서 포탄의 공포 중에도 주 양육자와 있었던 아이들보다 발달 트라우마가 더 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트라우마의 희생양에는 여덟 살의 올리버와 그의 바로 위 형인 열두살의 마이클이 있었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인과를 운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형제에게 비극이라는 운명이 닥쳤다.

2차 세계대전 중 공습의 위험이 덜 한곳으로 이동중인 아이들의 모습. 올리버 형제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자료 : https://academic-accelerator.com/)


두 형제가 보내진 곳은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브레이필드라는 기숙학교였다. 폭격을 피해 부모의 손에 의하여 기숙학교에 맡겨진 아이들이 많았으나 점차 시간이 흘러 모두 본래 가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올리버 형제는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들이 떠난 뒤 기숙학교는 바로 폐쇄됐다. 이는 아마도 의사인 부모님들이 전쟁으로 인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마지막까지 헌신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애석하게도 두 형제가 생활했던 기숙학교는 최악 중에도 최악이었다. 두 형제는 기숙학교를 두고 ‘강박적인 체벌주의자 남편, 부도덕한 아내, 병적인 고자질쟁이 딸이 운영하는 흉측한 기숙학교, 지옥의 구덩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 낙원에서 사랑받으며 자신들이 타고난 호기심과 기량을 키워가던 두 아이는 하루아침에 하루도 빠짐없이 두들겨 맞았고, 몸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시퍼런 멍이 들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피하고자 머물렀던 피난처가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와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해맑은 미소가 잘 어울리는 어린시절의 귀여운 올리버 색스(자료 : 올리버색스 재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올리버의 어린시절 기억을 살펴보면 참 아름답다. 아버지와 함께 머물렀던 해변가에서 즐겼던 수영, 오크 판으로 마감된 조용하고 아름다운 서재에서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책을 읽었던 시간, 빅토리아 시대 때부터 지속해온 런던의 오래된 박물관들의 흥미로움과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추억 등.

이처럼 행복했던 ‘유년기의 낙원’에서 갑자기 추방당해 ‘지옥의 구덩이’에 떨어져버린 올리버는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부모님이 학교에 방문했을 때, ‘어머니에게 달려가 무릎을 거세게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나를 두 번 다시 여기에 남겨놓지 말아줘요!” 그러나 올리버의 어머니는 올리버를 떼어놓으며 그랬다가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강조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올리버는 그 순간이 어머니에게 격한 감정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어린 올리버는 자신이 빠졌던 지옥의 구덩이가 바닥이 무너져 다시금 더 밑으로 떨어진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엄마와 소통할 수 없으면 자기 자신과도 소통할 수 없다.' 는 한 발달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다.


에릭 에릭슨은 8살 무렵의 아동은 사회인으로 역할을 하기위해 필요한 사회적, 인지적, 심리적 기술을 학습해야하며, 특히 학교에 입학해서 그러한 기술과 지식을 배우면서 점차 쌓이는 성공적인 경험에 의해 숙달감, 성취감, 근면성을 느낌으로서 유능(Competence)라는 발달과업을 달성해야한다고 말한다. ‘(인간과 사물의 세계에서) 나는 무언가 이룰 수 있을까?’라는 존재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면 유능감이 발달할테지만, ‘아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열등감이 커진다. 즉 학교와 같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회적 공간에서의 성공적인 사회적 역할 수행이 무척 중요하다.


올리버는 흉측한 기숙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어떤 사회적이고 인지적이며 심리적인 기술을 학습했을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유능감을 찾을 수 있었을까? 먼 훗날 올리버는 한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방송에 나온 한 영국인은 2차 세계대전에서 부모에 의해 시골의 기숙학교에 맡겨졌고 학대를 당한 경험을 말하며 “저는 여전히 세 가지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유대를 형성하는 문제, 어딘가에 소속되는 문제, 사람들의 말을 믿는 문제”라고 얘기한다. 올리버는 이 영국인의 상태가 어느정도는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토로한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신념을 문장으로 간직한다. 그 글귀는 보이지 않는 ‘자동사고’가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기억이 있는 한 우리 모두는 과거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 누구도 과거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 다만 예전에 했던 그 경험과 교훈이 만든 신념이 삶 전체에서 ‘기능적인 자동사고’가 될 수 있고, ‘역기능적인 자동사고’가 될 수 있다.  


두 형제에게 이 때의 경험은 어떤 자동사고로 기억되었을까? 어린 자신들의 전부인 부모가 자신들을 지옥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던 것을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올리버는 말한다. “음, 유년시절의 나는 부모님들이 나를 어떻게든 멀리할 궁리를 하고 있다고 상상했어. 몇 년 후, 나는 그분들이 정말로 엄청나게 바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어.” 두 형제의 삶에서 첫번째 시련은 무척 컸다. 후에 올리버의 형은 조현병이 발병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했던 학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올리버는 그러한 형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정신병이 발병할까 두려워하며 더 자신만의 세계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모두 대체로 ‘어린 시절’에 ‘중요한 삶의 신념’을 이어받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념을 이야기한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삶은 모든 면에서 죽음으로 가고, 나와 주변 사람들은 사라지며, 결국은 우리를 기억하는 것들은 근본적으로 사라진다는 측면에서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아버지가 남겨준 신념은 우리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체험들로 가득하지만, 이것에 집중하기보다 허무, 염세에 기반하여 '살아보기도 전에 죽어버린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문제였다. 내게 이 책은 아버지의 역기능적인 자동사고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작가의 투쟁기이자,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맹목적 신념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장르의 과학 소설 같았다.


신념의 형성이나 새로운 도전 과정은 우리 삶의 전반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규칙, 안정, 평화, 여유, 낙원’을 의미하는 에서 어느날 갑자기 ‘교착, 혼돈, 불안정, 분투, 지옥’을 의미하는 구덩이나 광야로 내쫓기는 경우를 쉬이 경험한다. 나이와 관계없이, 선과 악의 구분과는 별개로, 상류층이나 중산층이나 빈곤층에 국한되지 않고 이뤄지는 변화의 요구가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덩이에 빠져도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뿐이다.


독일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빼어난 작가인 토마스 만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다. 올리버가 태어난 1933년부터 집필을 시작해서 2차 세계대전 도중이었던 1943년에 완결된, 무려 11년이나 집필한 토마스 만의 4부작 장편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는 6권으로 출판되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인물들 중 아브라함, 야곱, 요셉의 신화를 인간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 형제들’에 속하는 열명의 형들과 한명의 남동생, 한명의 누이가 있는 요셉은 어머니 라헬을 빼닮은 아름다운 용모와 똑똑한 머리로 아버지 야곱에게 내리 사랑을 받는다. 좋게 말해 내리 사랑이지, 차별적 사랑에 의해 상처받은 열명의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에 목말라하고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요셉을 미워한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늘 사랑과 관심만을  받아왔기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요셉 자신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철석같이 믿으며 자기중심적인 자신만의 낙원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미움받기 딱 좋은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이 모습을 참다못해 화가 치밀어올랐던 형들이 그를 피해 ‘세겜’이라는 곳으로 향한다.


그러던 어느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세겜 골짜기로 향한다. 자신은 늘 사랑받아야 한다는 나르시즘으로 무장한 요셉은, 마침 며칠 전 아버지가 선물해준 아름다운 베일옷 입은 채로 형들에게 자랑한다. 결국 형들의 참았던 분노는 폭발하고, 요셉은 형들에게 죽기 전까지 얻어맞으며, 그 귀중한 옷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벌거둥이가 되어 우물에 던져진다.  ‘우물 가장 자리에 이른 형들이 영차 하면서 휙 던져 버리자 요셉은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물론 끝없는 심연, 바닥이 없는 나락은 아니었지만, 요셉에게는 충분히 깊은 곳이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분노를 누군가에게 표출하곤 하지만, 두들겨패고 우물에 던져버릴 정도의 감정이라면 그 깊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형제를.


우물에 빠진 요셉은 맞아서 엉망이 된 몸의 아픔과 축축하고 컴컴한 우물의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의 소란스러움 한 가운데에서, 빛으로 가득한 위를 보며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사정한다. 복수심에 뒤를 생각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던 형들은 그제야 아버지의 불과같은 성정을 생각하며 제 정신을 차린다. 이제는 자신들에게 닥칠 화에 두려워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으로 차마 동생을 죽이지 못하고 이집트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긴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여살의 올리버처럼, 변화의 한 가운데에 억지로 초대되고, 그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요셉은 이 경험으로 자신의 가지고 있던 기존의 신념이 정말 말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셉의 이야기가 영웅적인 것은, 자신이 겪은 엉망진창의 경험으로 재수정한 신념이 그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올리버의 형 마이클의 이야기가 비극인 것은, 그 경험으로 만들어진 신념이 그의 삶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리버는 이 경계에서 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으나 힘을 낼 수 있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종교경전 중 하나인 ‘구약성경’에는 에덴 동산과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은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간의 죄, 즉 원죄 개념을 설명하지만, 종교적 의미를 제외하고 바라보면, 아담과 하와는 본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나와야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며,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이슈는 늘 우리의 지척에 존재한다. 그 요구가 내부 혹은 그 요구가 내부 혹은 외부에서 시작하거나 그 자극이 급격히 오느냐 서서히 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대체로 이것들은 서로 얽혀서 찾아온다. 그리고 이를 겪어갈 때, 이 변화요구는 상처의 기억을 남기기도, 극복의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올리버와 마이클이 지옥의 구덩이 같은 기숙학교에서 삶의 잔인한 변화에 초대 받았을 때 두사람은 너무도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다행히 올리버와 마이클에게 지옥의 악마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두 형제의 이모인 ‘헬레나 란다우’는 기숙학교에서 65km 떨어진 곳에서 ‘숲의 학교’를 운영했는데, 휴일에는 그 학교에서 “그 시기에 거의 유일한 ‘좋은 사람’인 이모를 만나며, ‘이성, 유머, 확신’의 표상”을 경험하며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력하게 갇혀있던 어린아이였을 뿐인 올리버는 자신이 생애 최초로 겪는 트라우마에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초자연적 힘’을 갈망하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거나 학교 근처 시골 마을에서 말을 타며 자신의 존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대상과 동일시하며 힘을 얻곤 했다. ‘나는 말의 힘과 유연함을 사랑했다. 녀석의 사뿐하고 경쾌한 움직임, 그 따스한 체온과 들큼한 건초 냄새는 지금까지 생생하다.’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세계적인 학자다. 그는 9.11테러 당시 그와 친하게 지냈던 부부의 자녀인 다섯살 ‘놈 사울’이 테러를 직접 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그들의 집에 방문한다. 테러 후 열흘 뒤인 9월 21일에 방문한 그에게 사울은 테러 다음날 아침에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도화지에는 사울이 9.11에 본 광경, ‘비행기가 고층 건물에 추돌하고 불길이 피어오르며 소방관들과 건물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그려져있었다. 그런데 그림 아랫 부분에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검은색 큰 점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색 큰 점에 대해 사울에게 묻자 ‘트램펄린이에요’라고 답한다. 여기에 왜 트램펄린이 있냐고 묻자 ‘그래야 다음번에 사람들이 뛰어내릴 때는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한다.


트라우마는 허용할 수 있는 경험의 범위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그러나 끔찍한 경험 후 그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 여부는 트라우마 극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울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는 능동적인 행동을 취한다.(실제로 사울은 폭격에 의한 잔해와 재, 연기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달아나서 현장을 벗어났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을 구해냈고, 안전한 집에서 침착해진 마음으로 자신에게 발생한 일들을 머리로 정리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장면을 대체하는 생명을 구해주는 트램펄린까지 상상한다. 


성인이 보기에는 다소 적용하기 어려운 대응방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생각(인지)를 변화하여 치료적 요소로 적용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는 일종의 인지치료이지 않았을까? 다만 애초에 환상 자체가 비합리적인 사고라 인지치료의 전제와는 다르지만, 다섯살 아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실행 한다. 또 사울은 평상시 가족들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아온데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가족도 없었으며, 어린아이들이 보통 재난 상황에서 부모를 본보기로 삼는데, 사울의 부모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아이가 필요로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사울은 평생 간직할수도 있었을 트라우마를 가볍게 앓고 지나갔다.


우리의 올리버도 비슷한 대처 방식을 보인다. 올리버는 자신이 당한 재난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이모의 존재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해주었고 어른에 대한 신뢰도 간직할 수 있었다. 또 초월적인 힘을 상상하며 자신이 현실의 어려움을 가볍게하여 극복하는 힘을 얻곤했다. 무엇보다 이 시간을 통해 올리버는 일종의 행운을 경험하게도 되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 놓고 책을 읽은 경험이었다(물론 행운이란 것은 먼 미래의 시점에서 돌아봤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올리버는 어린아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외시킨 부모님의 행동과  모습을 보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학습한다. 그리고 올리버의 내면에는 자신의 존재를 신뢰하지 못하는 회색 유령이 짙어진다. 올리버가 후에 자신의 미들 네임인 ‘울프’를 강조하며 정체성을 자유롭게 강조했던 것도, 남자다운 모터사이클을 타며 속도감을 즐기고, 강인한 근육을 키웠던 것도 자신의 나약한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서사였다.


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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