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기와 견디기’는 사회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방식이다. 끈기, 성실함, 인내심 등과 같이 노동자 계급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버티기와 견디기’는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신화의 근간이기도 하다. 승자독식체제와 성과중심사회 속에서 ‘버티기와 견디기’에 실패한 순간 모든 잘못은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전가된다. 참 손쉬운 자본가의 논리다.
사회학자 안드레아스 레크비츠는 재화와 노동의 양극화로 형성된 “신중간계급”과 “신하위계급”의 간극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의 양극화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불평등한 분배와 불안정한 노동 환경 속에서 신하위계급의 일상 논리는 자기 실현의 부재와 사회적 야망이 거세된 “그럭저럭 힘겹게 헤쳐가기muddling through”다.[1] ‘나쁜 문화’라는 문화 가치 박탈은 신하위계급이 지닌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도 이어진다. “그럭저럭 힘겹게 헤쳐가기”, “버티기”, “이 앙다물기”[2]와 같은 반응을 통해서 그들은 ‘정상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동시에 제자리를 유지하는 일조차 벅차다. 산업자본주의에서 문화자본주의로의 이행한 까닭에 사회 계급의 ‘버티기와 견디기’는 신하위계급의 문화 영역의 향유 논리로 확장된다.
A시의 시립미술관의 한쪽 외관은 철근과 파란 비닐로 막혀 있었다. 본인을 자원봉사 중이라고 소개한 도슨트는 잠시 그쪽을 쳐다보며, 벌써 시립미술관이 개관한 지도 30년이 넘었다며 웃었다. 미디어 아트가 주로 전시되어 있는 주제관에서 이곳저곳을 포토존이라고 소개하던 도슨트를 따라다니기를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기획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텍스트였다. 미술관에서 문화자본이 없는 관람객의 유일한 동아줄이자 마음의 안식처인 텍스트가 무척이나 엉성했다. 맞춤법 오류도 잦았고 중간에 글자가 빠져 있기도 했으며, 영문 문장부호와 한글 문장부호가 제각기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의 오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교열과 윤문이 시급한 문장들이 작품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왜 교정 교열을 안 봤을까? 혹시 초고를 인쇄소에 잘못 보낸 게 아닐까?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관람료가 이곳과 비슷하고 전시장 내 텍스트의 질이 높았던 전시를 개최하던 공간들을 떠올렸다. 비엔날레처럼 세계적 규모의 전시이거나 앞에 ‘국립’이 붙은, 혹은 서울에 있는, 혹은 둘 다에 해당하는 공간들이었다. 미술 사조를 설명하는 학술적 단어와 시각예술을 언어화하려는 까닭에 현학적인 단어들로 밀도 높게 구성되어 한 눈에 이해하기 어렵고 계속해서 곱씹어야 그나마 고개를 끄덕이던, 비문과 오탈자가 적은 텍스트와 큰 전시 규모와 꽉 차던 관람객들을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정상적인/일반적인 미술관’이다. 잘 다듬어진 프로페셔널한 텍스트가 있는 곳이지, 초고를 인쇄소에 잘못 넘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아마추어적인 텍스트가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경건함’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고급문화의 공간인 미술관에서 아마추어적 텍스트를 만난 데에서 배신감이 들었다. 그러한 고급-저급문화의 이분화된 위계 개념이 정확하고 익숙하게, 서울-지방이 형성하는 위계에 덧씌워졌다. 미숙하고 서투른 글에 ‘이러니까 지방 미술관에 사람들이 안 오지’라고 생각하다, 불현듯 앞뒤의 인과를 바꿔보았다. ‘지방 미술관에 사람이 안 오니까’ 전문인력의 수가 수도권에 비해 현저히 줄고, 그러니까 이러한 자잘한 실수들이 생기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것을 견딜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기획 전시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에 나는 견디기를 선택했다.
고급문화를 전유하는 미술관에서 마주치는 조악한 문장, 오페라 실황 영상 상영 중 들려오는 코골이. 미숙함과 서투름에서 비롯된 열등감과 결핍, 몰락과 추락의 느낌을 견디고 버티는 생활이 이어진다. 함부로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쳐 벗어날 수도 없다. 긍정적 의미로의 재전유는 정신승리일뿐이다. 내가 향유 가능한 문화는 저급함을 버티고 견디는 것이고, 버티고 견디어도 간신히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럭저럭 버티기와 견디기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어디까지 버티고 견딜 수 있을까?
A시에서는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 수요일마다 공연 실황을 무료로 상영하는 ‘수요극장’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무료인 만큼 언제나 사람들이 모이지만, 통화를 하거나 졸며 코를 고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당시 상영하는 영상은 대학로에서 인기 있는 뮤지컬 실황이어서, 나도 재빠르게 20분 전부터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줄을 선 적이 없는 까닭에 어설프게 분포되었던 사람들은 조금씩 조밀해지며 줄을 만들었는데, 아무도 이 줄이 무슨 줄인지 소리내 말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줄의 맨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앞에 선 여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 현매(현장구매)줄 맞나요?” 내 물음에 여자는 자신도 현장구매를 하려고 줄을 섰다는 답을 주었다. 그렇게 고개를 꾸벅이려던 찰나에, “여기서 이렇게 사람 많은 거 처음 봐요.”라는 말이 이어졌다. 본인을 30대 후반이라고 설명한 여자는 그때부터 이 뮤지컬의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서 문화생활을 즐기기 어려운 이야기 등을 꺼내놓았다. 익숙히 맞장구치며 얼떨떨한 미소가 최대한 얼떨떨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사람이 주르륵 쏟는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재미있었고, 어느 정도는 그저 견뎌내는 것이었으며, 일부분은 또 공감했다. 나와 그는 각각 일행들의 표를 구하곤 돌아섰다. “재밌게 보세요”라고 고개 돌려 인사했지만, 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멋쩍은 인사 없이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와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처음에는 그가 말을 많이 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사실은 어색함을 버텨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터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을 위해서) 뒤돌아 후회할 것들이 뻔한 이야기들을 풀어 내주었던 건 그의 상냥함과 배려심 덕분이지 않았을까. 질문 하나로 그와 내가 ‘우리’가 되어버린 까닭에, 20여 분의 시간을 나는 견디고 그는 버텨냈던 것이다.
저급함이 끼어든 공간에는 어색함이 두려워 ‘나’를 크게 터트려내는 대화가 있었다. ‘우리’는 이곳이 아니면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공연은커녕 실황 영상도 볼 수가 없고, 그래서 코를 골고 의자에 발을 올리고 자주 전화벨이 울리고 상영 중에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어가는 무료 상영관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면서 서로를 견디고 버텼다. 이 경험이 모든 것들을 좀더 견딜만하고 버틸만하게 해줄지도 모르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참고문헌
[1] 안드레아스 레크비츠, 《단독성들의 사회》, 새물결, 2023, 501쪽.
[2] 같은 책, 505쪽.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에세이] 끼어든 저급함을 버티고 견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