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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랜드 2.

by olive


네스호를 지나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한 지형은 완전히 하일랜드 그 자체, 고산지대의 넓디 넓은 산악지형으로 바뀌었다. 아, 이것이 하일랜드로구나. 산 아래쪽에만 듬성듬성 나무들이 있을 뿐, 꼭대기쪽에는 이끼들만 자라거나 그도 아닌 흙이나 바위들만 보이는 삭막한 산맥들이 가도가도 계속 이어질 뿐이었다. 간혹 가다 높은 곳에서부터 작은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들이 눈에 띄었고 조금 아래에서 더 아래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나 강들도 보였다. 마치도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았던 상상의 세계, 기암절벽과 완만한 능선과 골짜기와 평원 등으로 채워진 황막한 대자연이 펼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쓸쓸하고 황량한,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기이하게도 산의 비스듬한 능선들이 나의 마음에 꽂히면서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아름다움 앞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인간이 감히 침범할 수 없었던 대자연의 신비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심정이었고 거대한 신의 작품 앞에서 인간은 한낱 점이로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장엄하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연이 그렇게 엄숙하게 자신의 모습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덧붙이거나 빼내지 않아도, 그냥 바라만 보아도 대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완벽했다.


올드맨 오브 스토르(Oldman of Storre)를 볼 때나 퀴랑(Quiraing)에 가서 주변을 둘러 보았을 때 압도적인 대자연 앞에서 저절로 한없이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이 분명해진다.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하는 일론 머스크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우주정복 시대에 그의 꿈은 곧 실현될지도 모르지만 불멸의 존재가 아닌 인간에게 죽음의 순간은 언젠가 다가온다. 그러기에 사람은 겸손해져야 한다.



올드맨 오브 스토르Oldman of Storre)는 뒤편에 거대한 바위 암석이 병풍처럼 둘러처진 가운데 그 앞쪽으로 뾰족한 바위기둥 몇 개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솟아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장엄한 뒤편의 바위병풍은 그 자체로 황홀했고 솟아오른 바위기둥은 너무도 도도해 보여서 그냥 할말을 잊게 만든다. 해발 791m 의 높이 위에 49m의 직립한 듯, 거꾸로 선 듯, 기묘한 모양으로 높이 솟은 바위가 6000만년 전의 화산활동과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졌다하는데 주위 풍경과 더불어 너무 아름다와서 그저 오래도록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도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땅속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용솟음쳐 나온 듯한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만 할듯한 조바심까지 느껴졌다. 간간이 비가 뿌리고 있었으므로 병풍바위 꼭대기 부분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었고 뾰족한 바위기둥들의 모습도 흐릿했지만 그래서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으므로 가슴을 후벼파듯 아름다웠다. 요즘은 이 바위기둥까지 하이킹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지만 우리는 갈길이 바빠서 먼데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한번 저기까지 올라가보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은 떨치기 어려웠다.

퀴랑(Quiraing)의 느낌은 또 달랐다. 퀴랑에 도착하기 전부터 더욱 심해지기 시작한 비와 세찬 바람에 우산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계속 뒤집혀졌고 목도리와 옷자락도 정신없이 흩날렸다.(겨울 하이랜드의 날씨는 이 정도는 보통이라 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가이드는 차를 언덕의 중간지점 쯤 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0분 시간을 주며 둘러보라고 했다. 이번에도 짙은 구름이 산의 정상에 걸려있고 우리가 서있는 곳의 조금 아래까지 안개가 깔려 있었지만 궂은 날씨임에도 우리가 그곳의 지형을 보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었다기 보다는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을 정도로 좀 더 자세히 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컸다는 게 맞는 말이다. 거기서 내려다 본 퀴랑의 지형은 여기가 지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특이했다. 마치도 어딘가 다른 우주의 한곳에 와 있는 듯, 크고 작은 봉우리와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산들, 연이어진 평원, 작은 호수들, 구불구불한 길 등이 어우러져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저만치 발아래에는 파도가 하얀 물결을 만들며 부딪쳐왔다. 그 광경이 너무 신비로워서 나는 연이어 환성을 터뜨리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은 우리 눈 앞에 거대한 상상화 한 폭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오묘한 지형이라니 !! 그 순간 여기에 오기까지의 모든 수고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이나 길 등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 해도 그밖의 모든 인위적인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자연의 세계가 거기 펼쳐져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고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의 모습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고 인간의 이성 보다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개념부터 바꿔야할 것 같았다.


킬트 락과 밀트 폭포(Kilt Rock & Mealt Fall)는 멋지면서도 예쁜 곳이다. 백미터가 넘는 길이의 바닷가의 해안절벽이 옹벽처럼 버티고 선 곳에서 그 중간에 폭포가 길게 물줄기를 늘이며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모양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바위들은 육각형의 주상절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렬로 줄지어선 듯 하고 높이 90미터의 엄청나게 높은 절벽에서 폭포수가 바다로 내리꽂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가막힌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절벽인 곳이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건 불가능하고 길에 서서 옆으로 비스듬히 볼 수밖에 없는데 그 멋들어진 자태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상절리 바위 모양이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입는 치마모양의 킬트와 흡사하다하여 킬트락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절벽의 위험하고 아스라한 모습과 떨어져내리는 하얀 물줄기가 기묘한 조합으로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을 떨리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외에도 스카이섬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네스 호숫가의 어커트 성(Urquhart Castle)과 스카이 섬 안에 있는 에일린 도난성(Eilean Donan Castle)도 하일랜드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성들 중 하나이다. 어커트 성은 호숫가에 폐허가 되어 쓸쓸히 서 있고 에일린도난 성은 스코틀랜드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인 재커바이트 운동에 연루되어 파괴되었다가 그 후손에 의해 다시 복구되어 관광객을 받는 성이라는 점이 차이점이지만 두 성 모두 오래되고 황폐화된 성에서 풍겨져 나오는 쓸쓸함과 위엄을 동시에 지니고 과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시간은 벌써 늦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고 스카이 섬을 떠나 돌아가는 귀로에서 만나 줄곧 옆으로 길게 따라온 네스호는 길이가 36km, 평균너비 1.6km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또 한번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울창한 삼림은 급경사를 이룬채 호수를 둘러싸고 있고 그레이트글렌에서 발원해서 호수였던 물이 강으로 변해 인버네스까지 흘러가는데 그러므로 호수인 것 같기도 하고 강인 것 같기도 한 출렁대는 물이 도시와 마을을 돌아 흐르는 모습이 이상한 감흥을 준다. 호수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는 동안 날은 차츰 저물어갔다. 거뭇한 형체로 따라오던 산들이 뒤로 자꾸 물러갔다. 조금 있으면 그 장엄한 대자연도 아마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어슴프레한 빛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저녁 속에, 어둠 속에 천천히 잠겨 들어가는 모습에 가슴이 시려왔다. 산도 호수도 계곡도 형체를 잃어가며 거뭇해졌다. 이런 어둠을 본 적이 있던가?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본 어둠 중에 가장 절대적이고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장엄하고 엄숙하면서도 경건한 것이었다. 건드릴 수 없는 그 무엇,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이 그 풍경 속에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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