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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명불허전 세계 최고의 도시

by olive



어쩌다보니 영국여행기는 완전히 순서가 뒤바뀌어서 처음에 와야할 것이 마지막에 오는 희안한 과정이 되어버렸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써내려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는 습성이 여기서도 적용된 것 같다. 처음에 런던으로 들어가서 5박을 하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다른 도시들을 몇 개 훑어보고 나서 다시 또 런던에 와서 마지막 여정을 보내고 비행기를 탔으니 어쩌면 그리 틀린 순서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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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아침도 못 먹고 새벽 여섯 시 반쯤에 나와서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이 여덟시 쯤, 요즘엔 짐 부치는 것도 항공사 창구에 가지 않고도 자동시스템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공항수속도 스마트패스로 신속히 하고 나니 비로소 배가 고픈 것이 느껴졌다. 카드사에서 제공하는 스카이허브 라운지에서 아침밥을 느긋하게 먹고도 시간 여유가 많이 남았지만 공항면세점을 굳이 지나쳐버렸다. 가서 이것저것 사치품에 눈 돌아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언제부턴가 나는 물욕에서 자유로워졌노라고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던 터라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심적부담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혹시라도 눈에 뭔가가 뜨이면 내마음 나도 몰라, 조그만 것 하나라도 사치품을 지르게 될지도 몰라서 아이쇼핑도 굳이 하지말자 라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은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면 남들처럼 쿨쿨 잠을 자는 체질이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방전시키지 않으려면 편한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을 보내고 비행기 의자에 앉았는데 이때부터가 고역이다. 비즈니스석을 타고다닐 형편은 아닌지라(이코노미 석도 감지덕지지 무슨 소리를?) 좁은 좌석에 앉아서 런던 도착까지 열 다섯 시간을 버틴다는 것이 이제는 점점 공포의 순간으로 다가오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남편이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을 예약해 놓아서 앞 자리가 없이 널찍해서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인간의 몸은 자는 시간에는 어쨌거나 등을 반듯이 누이고 다리를 뻗어야만 한다는 것을 열 다섯 시간 동안 또 다시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등을 반듯하게 누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잠을 못 자는 내 특이체질을 다시금 절실히 깨달으며 뒤척거리고 뒤척거리며 한,두 시간 졸았을까 말까 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낸 뒤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머릿속이 이미 하얗게 바래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빨리 호텔방에 눕고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간절한 소망도 히드로 공항에서 내려 엘리자베스 라인 열차를 갈아타고 <타운 힐> 역에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비 내리는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고나서 할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에 도착해 간단히 짐을 풀고 샤워로 지친 몸을 씻어주고 침대에 눕기까지 약 2시간이나 지나서야 간신히 목적달성을 할 수 있었다.

밤 8시쯤 도착해서 날은 이미 깜깜한데다가 역시나 런던 답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짐을 끌면서 눈을 크게 뜨고 구글맵 상으로는 바로 요 앞에 있어야할 호텔이 도무지 찾아지지 않아 결국은 택시를 잡아타면서 느꼈던 낭패감은 여행 내내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와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구글맵에 익숙지 않았던 탓인지 그후에도 길 찾기가 왜그리 어려웠던지 한편으로는 우리 나이를 탓하고 한편으로는 이래서 나이든 사람들이 패키지여행을 선호하나보다 이해심도 넓혀가면서 도착 첫날의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셈이 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조식을 먹고 간단하게 차린 배낭을 어깨에 메고 나와서 호텔 정면을 보니 왜 그렇게 똑같은 길을 돌고 돌아도 호텔을 찾을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만했다. 호텔 간판이 호텔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아주 조그맣게 서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젯밤에 온통 눈을 위로 향해서 호텔 이름이 건물 위쪽에 크게 써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어서 아래쪽은 볼 생각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해. 길찾기의 도사가 아니라면 이걸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어. 우리가 바보였던 건 아니야. 이건 아무도 못 찾았을거야.” 난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불만을 토해냈다.



우리 호텔 앞에는 포시즌스 호텔이 거만한 포즈로 멋있게 들어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었는데 거기를 통과하면 타운 힐(Town Hill)역으로 바로 연결되어 호텔 위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선 런던탑도 걸어서 갈 수 있고 타워브릿지도 걸어갈 수 있어서 그 호텔을 예약한 남편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런던은 무지막지하게 오래된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역사 문화유산만을 보더라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압도적이라서 무슨 어떤 형용사를 갖다 붙이는 것이 허망한 일로 보인다.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이다. 한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내가 본 것은 극히 일부겠지만 그렇게 스쳐가듯 본 것으로만 생각해봐도 영국 런던이라는 도시는 할말을 잊게 만든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한때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불렸던 나라,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이 사방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그 말로는 영국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는 것까지도 느끼게 된다.


비가 자주 오는 날씨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니면 그저 그들이 대범하고 용감해서 사소한 것쯤은 개의치 않고 뛰어넘는 체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국 사람들은 웬만한 비 정도는 그냥 맞고 다닌다. 비 맞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할머니들도 웬만한 비에는 그저 후드티 뒤집어쓰고 비 맞는 걸 예사로 여긴다. 우산 쓰고 걷는 사람들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뭐 이정도 비에 우산을? 하는듯한 눈초리에 스스로 위축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태도를 ‘용감성의 차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다른 나라를 복속시키며 영토를 넓혀 나간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동물로 비유하자면 맹수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고 당하기만 했으니 사슴이나 토끼쯤 될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자위하지만 그만한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영토를 넓혀나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치평가를 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논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런던에서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일일이 건물의 이름을 다 알아낼 순 없어도 거리 거리에 수많은 멋진 건물을 볼 수 있다. 거리 양쪽의 건물들에 시선을 뺏겨서 머리를 돌리느라 이쪽을 봤다가 저쪽을 봤다가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 느껴지는 것은 ‘아, 영국 사람들은 건축에 진심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런던은 도시 전체가 세계 건축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건축양식이란 양식은 총동원되어 런던거리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내가 건축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아는 바를 총동원해서 꼽아보면 고전주의 양식, 르네상스 양식, 고딕양식,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아르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금융기관이 몰려있는 씨티 오브 런던과 카나리 워프 등에는 또 현대적인 건물들이 높이를 뽐내며 화려하게 솟아 있다.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얼굴을 핥으며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을 맞으면서 천천히 강변을 살펴보면 그 수많은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하나의 건물들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양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많아서 경외심까지 솟아오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건물들을 그리도 멋지고 화려하게, 웅장하게 지어놓았을까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히 세계 제1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만의 지나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부와 영광을 웅장하고 멋진 건축물들을 세워서 과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에서 출발하는 배에서 강물 위에 떠서 그쪽을 바라보면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인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과 빅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찬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하는 빛나는 그 모습에 경탄을 금할 수 없어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나서 바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이번에는 런던아이의 거대한 바퀴가 마음을 빼앗는다. 그것을 바라보면 누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된다. 에딘버러에 올라가기 전에 이미 한번 타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아도 볼 때마다 또 한번 타고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작동버튼과 같다.


조금 더 동쪽으로 가다보면 이윽고 세인트폴 대성당과 런던탑이 보이고 런던을 대표하는 명물 타워브릿지를 만나게 된다. 나는 런던 탑과 타워브릿지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겼는지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은 커녕, 애착이 더 심해져서 안에서 둘러본 이후에도 계속 바깥모습이라도 보고 싶어했다.. 마침 런던에 처음 도착해서 5일간 머물게된 호텔(Apex city of London Hotel)이 바로 런던탑 근처여서 먼 발치에서 바라보이는 그 탑들의 자취를 찾느라고 근처에만 가면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난다. 타워브릿지도 마찬가지다. 실용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아름다운 다리는 런던을 떠나온 지 세 달이 다 되어가는 현 싯점에서도 여전히 내 가슴 속에서 짙은 잔영을 드리우고 있다. 이렇게 템즈강의 유람선에서 본 광경 중에 또 기억속에 강하게 남은 건물들은 바로 <워프>(wharf)라는 것인데 이것들이야말로 영국이 얼마나 산업화와 근대화에서 세계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앞서 나가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강변에 늘어선 수많은 육중한 건물들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수많은 식민지들에서 싣고 온 그 고장의 특산물들을 선적해두었던 창고 건물들이었는데 건물들의 갯수와 규모가 어마어마할 정도여서 그 시대 식민지무역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강변에 양쪽으로 늘어선 그 건물들은 이제는 사무실로 또는 아파트로, 호텔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어서 아직도 건물의 효용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런던은 이렇게 건축물들만 폼나게 많은 것이 아니다. 하이드 파크는 말할 것도 없고 세인트 제임스 파크, 리치몬드 파크 등 굵직굵직한 공원도 많지만 스퀘어 라고 이름붙은 군데군데 동네 공원도 많아서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북쪽의 에딘버러, 인버네스, 하일랜드 등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런던에서 5일동안 묵을 때 잡은 숙소는 대영박물관 근처의 러셀스퀘어 라고 하는 동네였는데 그곳은 블룸즈버리라는 행정구역에 속했고 옛날에 버지니아 울프 등 많은 문학가들이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동네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러셀스퀘어 가든은 넓이도 상당해서 입구로 들어가면 곧바로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주곤 했다. 나무그늘도 많았고 벤치도 많아서 동네주민들의 휴식처로 충분해 보였으며 한쪽 코너에 있는 공원 카페에는 모여드는 손님들로 항상 만원이어서 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 한끼 점심을 그곳에서 먹은 적이 있는데 음식 맛도 괜찮았다. 카페 입구에는 결코 짧지않은 카페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거의 100년이 가까웠던 걸로 기억한다) 팻말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그 동네에 묵었던 5일 동안 공원을 가로질러 오고 가면서 이 정도 규모의 공원과 카페가 요소요소에 있다는 것이 매우 부럽단 생각이 들었었다. 런던이 인구도 많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종들의 전시장처럼 보여서 언뜻 보면 숨막힐 듯 답답하고 복잡한 것 같아도 이 많은 사람들을 위무하는 공원들도 곳곳에 있으니 꽤 살만한 도시라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로 가기 위해 유람선을 타고 그리니치에 도착했을 때도 그 앞에 있는 탁 트인 공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행들과 함께 와서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내심 놀라웠었다.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군데군데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먹기도 마시기도 하고 담소도 나누면서 평화로운 휴일을 보내는 모습을 보는 건 나에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단순히 천문대가 아니고 여기에도 이렇게 큰 공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구나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런던에선 마음이 내켜서 어디로든 나가면 마음에 휴식과 위안을 주는 공원을 만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리니치 천문대 안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었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세계 이곳저곳을 배를 타고 다니며 교역도 하고 식민영토 구축에 힘을 썼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과 항해지도가 필요해서 정밀시계와 세계지도의 제작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우주과학과 천문학을 제일 먼저 발전시킨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에서 만들면 세계의 표준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 확립된 것이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Prime Meridian)이고 이곳이 바로 세계표준시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박물관 앞 마당에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되어 그어놓은 본초자오선에 양쪽 발을 걸치고 “이쪽은 0도, 이쪽은 360도”라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러셀스퀘어에서 북동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영국도서관이 나오고 거기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 서울역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하는 길에 세인트 판크라스 르네상스 호텔이 있는데 지나가는 길에 건물모양이 너무 강렬하게 호기심을 자극해서 들어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밖에서 보는 건물의 규모와 색깔, 건축양식이 특별했을 뿐 아니라 외양이 화려하고 멋지고 위엄도 있어보여 이건 무슨 건물이지?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무조건 들어가 보았다. 빨간 벽돌로 높고 크게 지어진데다가 창문이 전부 아치형이어서 특별한 느낌을 선사했다. 왠지 대영제국 시대의 스멜이 나는 것 같았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끝도 없는 부를 과시하는 듯한 건물이 도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건물 1층은 카페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공간의 넓은 개방감이 아주 특이해서 휘휘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천장이 햇빛을 투과할 수 있는 투명창으로 되어있어 실내같기도 하고 옥외같기도 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가 이곳 커피값은 장난아니겠는데 라고 미리 긴장하게 만들었다. 역시나 우리나라 호텔보다도 훨씬 비싼 커피값을 지불하고 촌스럽게 휘둥거리는 눈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다가 커피와 홍차를 다 마신 뒤에 오래 있지는 못하고 코벤트가든 쪽에 가기 위해 나왔는데 역시 홍차맛(Earl grey)이 우아하고 진해서 기억에 남는다.


런던에 도착한 시점부터 떠나올 때까지 줄곧 나의 관심을 끌었던 곳은 런던 탑(Tower of London)이었다. 왜 그렇게 내가 그곳에 깊은 호기심을 품게 된 것인지는 나도 확실히 그 이유가 짚이지 않는다. 런던탑의 공식 명칭은 <His Majesty’s Royal Palace and Fortress and Tower of London>(국왕 폐하의 궁전이자 요새인 런던 탑)이다. 영국 역사의 1000년의 세월이 서려있는 곳이라서 아무래도 특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템즈 강 북쪽 연안에 오래된 성채가 묵묵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1066년에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후에 요새를 세운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런던탑의 명칭은 정복왕 윌리엄이 세운 화이트 타워(White Tower)에서 유래한다. 그후 천년의 세월 동안 더욱 많은 건물이 세워지면서 왕들의 궁전으로서 또 요새로서 역할을 했지만 런던탑이 유명해진 것은 가장 유명한 인물인 헨리8세의 왕비 앤 불린이 이곳에 갇혔다가 처형되는 등, 수많은 왕족들과 귀족들, 주요인사들이 갇히기도 하고 처형되기도 했던 비극적인 역사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런데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은 1994년부터 대중에게 전시된 워털루 블록의 보물수장고인 듯하다. 그곳에는 왕관과 보주, 보석, 왕홀, 검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압도적인 화려함과 위엄, 정교함과 장중한 멋 때문에 벌어진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이다. 찬란했던 영국의 과거 역사가 그대로 느껴지는 여러 개의 휘황찬란한 왕관들은 과연 영국이로구나 하는 감탄밖에 안 나오게 만든다. 런던탑 안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바닥에 깔린 돌들 하나 하나, 성벽에 쌓인 블럭들 하나 하나에 서려있는 길고 긴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관람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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