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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를 줍다가 칭찬을 들었다

< 여덟 살, 1995. 가을 >

by 장난감공장

< 여덟 살, 1995. 가을 >

#운동회 #초등학교 #칭찬



국민학교에 입학해 처음 운동회를 했다. 학생들과 가족들이 엉켜 운동장은 꽉 찼고, 청군, 백군을 응원하는 소리가 동네 이곳저곳에 울렸다. 들뜬 마음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왠지 모를 적막함마저 느껴졌다.



운동회가 끝나고 다시 간 학교 운동장은 사람 하나 없이 휑했다. 하늘에 걸려있는 만국기, 박 터뜨리기를 하고 쏟아졌던 색종이 조각들만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동네 친구들이 모래성이라도 만들고 있나 싶어 찾아갔던 운동장은 우리 집만큼이나 조용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나 하나가 운동장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한 삼 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슬금슬금 내 옆으로 오더니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우유갑에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넣고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같이 하자는 눈치였다. 내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자 불쑥 한마디 했다. "누가 이렇게 쓰레기를 버렸네. 이걸 치우면 선생님이 칭찬할지도 몰라."



사실 난 칭찬이라는 게 와닿지 않았다. 약속을 잘 지키거나, 수업 시간에 손들고 발표를 하거나, 또는 청소를 열심히 하면 받는 포도알 스티커 같은 게 칭찬이었을까. 내가 시큰둥하자 그 누나는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다. "강에 살고 있는 조개가 왜 여기에 있지?" 그 조개라는 것은 운동회 때 먹거리 수레에서 판매하던 다슬기 껍데기였다. 눈길을 바닥으로 향하자 정말 운동장 흙바닥에서는 볼 수 없는 조개같이 생긴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혹했고, 그것을 같이 줍기 시작했다.




손에 든 페트병에 쓰레기와 함께 다슬기가 반정도 채워졌을 때쯤,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 줍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너희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니?" 하고 물었다. 그 말에 아까 선생님께 칭찬을 받겠다던 누나는 "네, 저희는 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하더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에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서 저희가 치우는 중이에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얘기하고 고학년 교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쓰레기 줍기 놀이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선생님이 우리를 야단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괜스레 누나를 흘겨보았다. 착한 일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우리는 누나가 제안한 놀이를 하고 있던 게 아닌가.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내며 우리에게 건넸다.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솔선수범해서 한 것은 착한 일이라고.



우리는 운동장 구석에 앉아 말없이 한참 동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각자 우유갑, 페트병에 욱여넣고 또다시 쓰레기 줍기 놀이를 시작했다. 아니, 솔선수범해서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는 착한 일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단지 다슬기 껍데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베테랑 고학년 선생님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러나 "얘들아, 더럽게 그런 걸 만지고 그러니? 가서 손이나 씻으렴." 하기보다 "청소를 해주어 고맙구나" 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준 덕에, 그날의 어린이는 커서도 착한 일을 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 아마 선생님의 칭찬에 잔뜩 들떴던 그 누나도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어렸을 적 의도치 않게 운동장을 청소하다 칭찬받은 일 하나로 지금의 태도가 만들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서 수업이 끝나고 비뚤어져 있는 책걸상을 반듯하게 정리했을 때, 고등학교 때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친구를 붙잡아 교실로 이끌었을 때 누군가는 그 행동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칭찬은 곧 내 행동에 대한 타인의 인정이다. 남이 내가 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인정해 주는데 착한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끔 아내는 남들이 꺼리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골치를 앓고 있는 나를 보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핀잔을 준다. 내 늦은 퇴근에 독박 육아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져 슬그머니 아이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제 방을 치운다. 저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서일까? 그렇지만 나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정리를 잘하는구나." 하며 칭찬을 한다. 그럼 아이는 또 신이 나서 옷장 정리까지 하기 시작한다. 이유야 어떻건,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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