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란 이토록 정확하고 예리하다.
추석이면 으레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건만 올 추석이 유난한 건 100년 만에 보는 완벽히 둥근 보름달이기 때문이란다. 달은 본디 둥글건만, ‘완벽한 둥긂이’ 왜 강조되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달은 크고 둥글었다. 그리고 딱 하루가 지난 어젯밤에 그 달은 완벽을 자랑하는 둥긂이 사라졌다.
소원을 빌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시원하도록 밝은 빛을 보며 소리죽인 바램을 구겨 넣었을까. 달은 아마 닳아버렸을게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추석의 짧은 연휴지만 한 날도 허투루 쓸 여유가 없어 조용한 학교로 간다기에 아침 일찍이 데려다 주었다. 아들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잠시 눈을 감고 나는 라디오에서 흐르는 뉴스에 귀를 세웠다. 태풍 힌남노가 할퀴고 간 상처가 곳곳에서 드러나며 안타까운 사연들도 툭툭 터져 나왔다.
'포항 아파트 주차장에 빗물이 차오르자 차를 빼러 갔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나갔던 중학생 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너라도 살아서 나가라는 엄마의 권유에 먼저 차 문을 열었다고 했다. 엄마는 살아서 돌아왔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는 없었다. “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들었던 아들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했다.’
울컥 터져 나온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아들의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려가지 않고 가슴을 찔러댔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는 갑자기 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엄마가 살아갈 세상은 한없이 외롭겠구나.
아이를 다시 데리러 간밤에도 달이 환히 떴다.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추석은 달뜬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가족이 둘러앉았고 풍성한 식탁이 있고 식탁 위에 웃음이 있고 넉넉한 여유가 있는 추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추석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외롭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절박한 현실이 식탁을 덮고 기다릴 것이다. 스무 살 청년에게는.
‘보육원의 보호 아동은 18세가 되면 자립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보육원을 떠나 홀로 서야 한다고 했다. 자립 금 700만 원을 손에 쥐고 대학생이 된 청년은 보육원을 떠났다. 그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돈 700만 원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서기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너무 어린 그는 스스로 생을 마쳤다. 그가 떠난 방에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라고 적힌 쪽지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견뎌내어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에 극도의 고통이 수반될지라도 참아 볼 수 있는 인내쯤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은 어쩌면 공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청년에게 외로움은 극복할 수 없었던 고통이었을까.
홀로 견뎌온 외로움이 보여서 내내 가슴이 쓰렸다. 완벽히 둥근 달에 그를 위한 기도를 한 자락 올렸다.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 유토피아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유토피아는 어린 시절이라고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안전이 보장되고 내일의 걱정이 없던 나의 어린 시절로 하루만 갈 수 있다면, 나는 이젠 세상에서 사라진 내 가족들에게 차마 못 하고 떠나 보냈던 말을 하고 싶다. 키워주셔서 감사했다는 그 말을.
당신도 유토피아로 갈 수 있다면 좋겠다. 딱 하루만.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그때, 당신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된 그 날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차마 못다 한 말을 전하고, 후회하지 않은 다른 선택을 하고, 고통이 있어도 참아볼 수 있는 외로움을 견뎌내서, 둥근 달이 진 다음 날들을 땀을 흘리면서 함께 살아냈으면 좋겠다. 100년 만의 둥근달이 떠오르면 그저 방아 찧는 토끼의 전설을 이야기 하고 그 빛으로 만든 그림자에 한 뼘이나 자란 키를 대견해하는 그런 날을 함께 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농담에 파안대소하는 형형색색의 일상을 살고, 헤세의 데미안을 찾아 가끔은 술잔을 나누는 파란 청춘을 살고 싶었다고.
그렇게 우리의 유토피아에서 딱 하루만 당신과 함께 숨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