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순간 맘에 들지 않았다 시커먼 생김도 그러하거니와 지나치게 과묵한 꼴이 싫었다. 생면부지의 우리가 마주 보고 선 순간 호감을 보이며 다가선 나를 그놈은 본체만체하며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나 보다 작은 놈이 혹여 새 환경에 낯설까 먼저 말을 걸었다. 반가워 반가워!! 그런데 그놈은 내 호의를 무시하고 쌩 하니 지나쳐 가버렸다. 무례한 놈!! 그놈은 멋대로 집안을 들락거렸다. 거실 구석구석을 돌아보더니 안방을 거쳐 우리 형아방도 거리낌 없이 들락거렸다. 그 꼴이 못마땅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엄마는 되레 나를 나무라신다. 그리고 연신 대견한 눈으로 놈을 바라봤다 그것은 내가 가끔 애교를 부리거나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은 날, 센치한 척 하며 앉아 있을 때 바라보는 눈빛과 같았다. 그런 눈을 그놈에게 보여주다니. 어이가 없다. 왠지 모를 배신감과 서운함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기저기 멋대로 기웃대던 그놈이 이번엔 내게로 다가온다 천천히 나를 보며 걸어온다. 판단을 해야 한다. 그놈이 손을 내밀면 모른 척 받아줄까. 아님 이참에 기를 꺾어 내가 얼마나 대차고 센 놈인지 보여줄까. 사실 내 외모가 이쁘장해서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호감을 보이며 다가올 만큼 인기가 꽤 있다. 하지안 알고 보면 나는 꽤 성깔 있는 상남자다. 가끔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거나 화가 나서 꼬라지를 부릴 땐 우리 가족들도 혀를 끌끌 차곤 한다. 내가 이렇게 한 성깔 하는지도 모르고 말없이 오만방자하게 구는 그놈에게 매운맛을 보여줘야겠다.
" 이 자식, 어디 오기만 해라. 반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오줌을 싸게 만들어줄 테다"
나는 엎드려서 다가오는 그놈을 가만히 노려본다. 놈이 온다. 천천히 나를 보며 걷는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진정한 파이터는 기싸움에서 지면 끝나는 거다.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눈을 더욱 부릅떴다. 부릅뜬 눈이 시큰 거려 눈물이 맺혔다. 맺히는 것까진 용서한다. 제발 흐르진 말거라. 가슴이 두근 거려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런데 놈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그저 처음 본 순간처럼 덤덤하다. 아, 정녕 싸움의 고수가 아닐까. 긴장된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 우리 수컷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서열을 가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 여자들이 서로의 외모를 슬쩍슬쩍 스캔하며 은근히 견제하는 것처럼.
오늘 결판을 내야겠다. 놈이 오면 먼저 큰 소리로 냅다 기합을 한 번 넣어주고 잽싸게 선방을 날려야겠다. 그놈과의 거리를 계산하고 선방을 날려 버릴 다리의 각도를 계산했다. 두어 발짝만 더 다가오면 오른 발로 쨉을 날릴 수 있겠다. 그래, 오너라 이놈!!
놈이 가까이 온다. 한발 또 한발.
내가 팔에 힘을 주며 엉덩이를 쭉 빼고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그놈이 몸을 휙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엇, 계산이 어긋나버렸다.
"어쭈. 야! 야!"
꼬리를 빼고 도망가는 놈을 향해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인마!! 내 뜨거운 주먹맛을 보란 말이다. 오늘 누가 진정한 강호의 고수인지 결판을 내자. 악을 쓰며 대드는 나를 보고 엄마는 시끄럽다고 또 나만 야단을 친다. 순간 이성을 잃고 엄마에게도 냅다 소리를 쳤다.
"왜 나만 야단쳐요. 저 놈이 먼저 시비 걸었다구요. 오늘 저놈과 끝장을 보렵니다!!"
분에 못 이겨 펄펄 뛰는 나를 엄마는 번쩍 안고 툭툭 두드려주셨다.
"아이고, 시끄러워라. 그만 좀 짖어라"
엄마가 달래주니 조금 맘이 가라앉는다. 내려다보니 그놈은 여전히 느릿느릿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벽 쪽에 촥 붙어버렸다. 그리고 "청소가 다 되었습니다."라는 상냥한 말을 전하고는 움직이질 않는다. 뭬야!! 여자였어? 나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저 건방진 놈을 한 바탕 시원하게 패주고 이 집에서 확실히 서열을 정했어야 했는데....쳇!!
물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는 결심했다. 내일은 꼭 놈에게 내 멋진 주먹맛을 보여줘야지. 왈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