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밖으로만 열릴 때가 있다. 남의 입만 바라보며 허우적거리다가 귀가 뒤로 붙어 버린 것을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 입으로만 건너 다니는 소문들은 대개 진실처럼 굳어지고 어수선한 맘으로 삐져들 온 소문들은 진리인 양 믿음이 돼버린다. 불안한 내 맘이야 모른 척 접어둔다 해도 아이 마음에 귀를 닫고 남 말에만 귀를 세운 것이 늘 문제가 되었다.
아들이 학습을 시작하면서 내 눈은 이미 먼 곳을 보며 기준을 세웠다.
"내가 아는 누구의 아들이 영어 레벨이 어디까지 갔다더라" "내가 아는 엄마는 아들이 무슨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카더라" "내가 아는 엄마 딸은 무슨 영재학원을 다닌다카더라."
"그렇다 카더라"의 주체는 대부분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느 엄마의 아들딸들이었다. 그 아들딸들은 입으로 건너 다니며 날이 갈수록 덩어리가 커지는 느낌이었다. 나처럼 귀가 뒤로 붙은 엄마들의 불안을 먹으며 쑥쑥 자랐다. 아들을 데리고 영어 학원에서 레벨을 확인하며 우울해졌다가 경시대회 수학문제집을 들이밀었다.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문제 앞에서 주눅 들었던 아들의 마음일랑은 못 본척하며 왜 누구처럼 척척 해내지 못하는가에 화가 났을 것이다.
아주 예전에 직장에 들어갔을 때 낯설고 어색했던 환경 속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지적하는 선배를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이니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아니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천천히 가르쳐 주면 됐을 것을. 날 선 눈빛으로 바라보던 표정이 참 싫었었다. 자기의 감정만 중요해서 남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설익은 인성 탓 일 거라며 나도 선배 등뒤에서 투덜거렸다.
상대를 생채기 내는 줄 모르고 다그치는 태도로 그때 내가 아이를 대하고 있었음을 일기를 읽으며 다시 깨닫는다. 오랫동안 나는 실체 없는 어느 집 아들 딸들을 기준으로 삼으며 아이 마음을 볶아댔던 것 같다. 나의 귀는 남들의 평가를 듣는 것에만 열렸고 눈은 항상 먼 곳만 쫓을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내 귀는 조금씩 바로 세워지기 시작하고, 아들이 휘청거리면서도 바로 서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잘못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자기만의 화분에 어울리는 예쁜 꽃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내 귀가 뒤로 열려 있던 순간에도 자기의 꽃을 피우기 위해 홀로 애쓰고 있었다.
운동을 하러 나가는 천변에서 늘 마주치는 그분은 몸이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지셨다. 비틀어진 몸으로 휘청거리며 걷기 때문에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그분이란 걸 알 수 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걷는 탓에 피부는 까맣게 타버렸다. 후덥지근하게 더운 오늘도 그분은 짧은 운동복을 입고 열심히 천변을 걷는다. 비틀린 내 몸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의식하면 저렇게 거르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저분은 몸은 저렇게 기울어졌지만 눈과 귀가 바르게 앞을 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