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책
이사를 앞두고 짐들을 넉 달 동안 잘근잘근 씹어 버렸다. 나중에는 귀찮아서 대충 쑤셔 넣어버렸지만, 몇 권 없는 책들을 만지작했던 며칠간의 시간을 기억한다. 책들이 기대어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항상 꾸준히 읽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패턴이 궁금했다. 책이 내 방에 들어온 시기와 경로들, 선택의 날들을 정리되지 않은 방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생각한다. 언제 이건 왜 샀지?부터 겹쳐지는 작가에 대한 잊었던 호감, 읽지 않은 책. 재밌어서 아까운 마음에 멈춘 책, 읽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꽂아 둔 책도 보이고, 도무지 내가 샀을 리가 없어 보이는 책도 몇 권 있다. 어느 한 권조차 정확한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걸 나는 안다. 단 한 권도 없다.
난 그런 사람인 걸 안다. 귀로 듣는 것을 즐겼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도가 도임을 모르고 듣고, 샾이 붙어 있는 멜로디를 대충 듣지만, 그것들의 묘한 나열에 심취한다. 나 또한 그랬다. 음악이 내 방을 채우는 색깔이 좋았고, 내 감정이 만드는 길가에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나의 속에서 핀 꽃들을 피게 해 주었다. 버스 창가에 앉아서 마음에 드는 감정이 떠오르면, 마음만 먹는다면 내 머릿속에 마음에 드는 음악 한곡을 떠올릴 수가 있고 머릿속에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음악은 내게 그런 식으로 이미지로 새겨졌다. 나는 그런 식으로 즐겁게 우울할 수도 있었고, 혼자 길을 걸을 때도 얼마든지 내 세상의 주인공으로 있을 수 있다. 행복한 날이라도 찾아오면 몰래 혼자 배경음악을 틀었다. 당신들이 대충 좋아할 때, 그래서 난 정말로 좋은 날들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음악을 맘대로 주물러 놓고, 내 맘대로 가져다 쓸 수가 있어서 그랬다.
그 후로 나는 영화 또한 그렇게 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 영화를 떠올리면, 주인공의 이름은 당연히 기억을 못 하고, 누가 누굴 왜 죽였는지 조차 헷갈린다. 아니. 사랑을 했던가? 싶을 정도로. 눈을 감은 사람이 빛이 아닌 어둠을 감지하는 느낌으로, 영화 또한 내게 이미지를 남겨준다. 그런 식성이 나를 영화를 보게 만들었다. 보고 주물러대고, 내 몸 어딘가에 저장을 해둔다.
눈앞은 일렁이고, 귓가엔 무언가 흐른다.
데이터들이 널려 있다. 우린 그것들을 잘 정리하고, 연구를 통해 정보로 만들었다. 내게는 그런 과정들이 다른 식으로 생성되고, 다른 것들을 남긴다. 정보라고 말하기가 힘든 '이미지'적인 이것을 나는 나이가 들면서, 내가 어쩌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고통받고 불안에 치닫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천 위에 흐르는 저 아늑하고 희망을 질질 흐르고 다니는 공기가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인가 라는 강한 의심을 하게 되면, 그리고 그런 의심들이 늙어서 이제 절룩거리다가 스스로 얽혀 버리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주눅도 든다. 이상한 마음이 생긴다.
책도 그랬고, 그런 편이다. 다만 젊을 때 보다 뭔가 더 열심히 읽는 날이 늘어났을 때 속도가 조금 빨라진 정도랄까. 아무리 빨라도 어딘가에 반납을 제 때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보고, 듣고, 읽는 것들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사람사이에 어떤 종류의 어떤 다리를 세울 수 있을지까지도 관여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쉬흔을 앞두고 나서야, 충격적으로 솔직한 나의 서투름을 만났다. 내 주위를 보며 난 오늘도 웃음이 난다. 머릿속이 아닌, 차분해 보이려는 우울한 노래 한곡을 틀어놓고, 대충 글을 써본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쓴다. 머릿속은 어쩔 땐 조용해지기도 한다. 내 안의 엉뚱하고 정렬되지 않은 데이터가 혼란스러워도 가능하다. 다만, 이미지적인 그것을 계속 가지고 놀 수가 있다.
그것이 즐거운 것 같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든 일을 떠맡는다. 누군가는 작가의 의향을, 누군가는 반대편의 생각을 전한다. 즉 누군가는 자아의 생각을, 누군가는 대치하는 타자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 모두에게 발언권을 줌으로써 작가는 역동성을 얻는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는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 ㅡ 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 ㅡ 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비비언 고닉-상황과 이야기"
이 글은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라는 책의 한 부분이다. 글 쓰기에 대한 글이다.
우연히 읽은 저 문장이 좋았고, 또 읽을 땐 좀 더 힘이 될 것 같아서 책갈피 한 문장이다. 글쓰기에 대한 심플한 팁으로 보이는 저 문장이 되씹기를 반복하며, 다른 날에는 좀 더 와닿는 이유로 더 필요한 문장이라 여겨진다.
아직 난 소설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에세이를 쓰며 필연적으로 만났던, 자기 불안, 본능의 얼룩들,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잡아서 콕콕 찔러 죽이는 일들이 신기한가 보다. 지금도 내 맘대로 쌓아두었던 이미지가 켜켜이 떠돈다. 조용히 숨을 마셔도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있고, 그것의 맛을 글로 쓴다.
내 이야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좀 더 글을 다듬는 일이 필요함을 안다. 글에 두 팔 두 다리를 달아놓아야 사람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겠지만.
이 알 수 없는 고집이 말하는 것을 기필코 한 권의 책에 이어지는 것들에 담고 싶다.
내 상황은 그랬으니까. 이야기는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