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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쩌면 오늘 아니 내일

책에 미친 시기

by 밝둡

집에 두 개의 방

방 하나의 문을 제치면

배를 가르고 드러나는 뼈를 닮은

같은 책이 가득


하루를 시작하며 한 권을 끄집어 들었다.


물이 쓰여진 앞장을 조심히 꺼내어 얼굴을 닦고, 몸을 닦는다.

파도가 치는 종이를 뜯어내 천장에 달아 놓고

그 아래서 입을 벌리고 우물거리며 양치를 한다.


형편없이 쓰여진 쓸모없이 말만 많은 묘사 속에서 오늘은 생선 한 마리를 꺼내어

구워 먹었다.


주인공이 자주 다니는 골목에 쓰여진 커피숖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짜낸 후, 살짝 접어 두었던

앞장의 다른 동네에서 크래커 하나를 뽑아냈다.


창문 밖의 까다로운 태양빛이 신경이 쓰이는 오전이다. 그는 책에서 두터운 도끼 하나를 꺼내 책 자신의 반을 툭 하고 토막 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절규의 외침이 창문가에 달라붙어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하자, 남은 반토막의 책이 흐뭇해하며 옆으로 누워 커피타임을 즐겼다, 함께.


아침이 열심히 지나가다 보면, 그의 눈동자는 글자를 다 도려내버린 텅 빈 종이 같다. 치매노인처럼 투명해진 그의 눈동자에 책 속의 모든 낮잠들이 하품처럼 모여든다. 눈 속에 눈이 펄펄 내리고, 그 위에 벚꽃들이 촘촘히 사이좋게 쌓인다. 책의 목록처럼 친절하게 안개가 그위를 사뿐사뿐 걷는다. 낮잠의 문고리를 열고, 란제리의 똑딱이는 단추처럼 톡 소리를 내며 한 올 한 올, 혀 같은 허무의 단잠.


잠이 녹고, 책이 녹으면, 또 한 권의 책이 고름처럼 삐져나왔다. 오전에 쓰였던 파도가 담긴 종이는 거실에 걸린 시계 분침을 조용히 힘없이 밀어내었다. 심심했던 방 안의 공기가 그것에 맞추어 숨을 참듯, 내쉬며 신음했다. 좋아하는 숫자의 페이지에서 몰랑한 젖가슴을 꺼내어 시큼한 공기를 달래주었다. 손님이 잠깐 왔고, 책 한 권을 쥐어주고 집밖으로 달래주었다. 그 소문을 들은 모르는 사람이 왔고, 책 한 권으로 내 쫒았다. 영원히.


한낮이 쌓인 한낮이 되면, 어제부터 물에 불려 두었던 책을 꺼내 든다. 책을 물에 불린 후 벽에 걸어두면 벽면을 타고 나름 쓸만한 글자들이 개미떼처럼 슬슬 기어 나온다. 이제 난 그 아래서, 영화 한 편을 보며, 팝콘 대신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다가 씹어 먹고, 녹여 먹는다. 입안에서 굴려 시를 뽑아낸다.


영화에서 분침처럼 또각또각 새어 나오는 그림들은, 책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개구리의 혀끝에 채이고, 말리고 말려 내 눈의 바닥에 쌓인 잡초들의 먹이가 되었다. 나무뿌리로 향하고, 힘 잃고 깎인 눈송이의 휠체어가 된다. 칼처럼 콧속에서 냄새를 새기고, 둥글 거리며 돌다가 댕강 거리며 웃은 채로 멈춘다.


해가 지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히 무릎을 꿇고 수그리고 앉아, 남아있는 태양아래 애처로움이 깃든 챕터의 글자들을 꿰맨다. 바늘 끝을 자음의 오해를 피할 곳을 찔러 넣고, 다른 문장의 대장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낚는다.

오늘의 무료함으로 책 속의 이별에 외계인을 등장시키고, 수긍할 수 없는 환생을 매듭짓는다. 치밀하고 속절없는 시간을 잠깐 즐기고, 책 한 권을 집어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장난감 총의 페이지를 뒷 주머니에 넣고, 실탄이 날아다니는 종이 조각을 겹쳐 넣었다. 앞주머니에 후회가 가득 채워져 있는 그녀의 스무 살을 찢어 넣었고, 빈틈없는 살인마의 손바닥이 그려진 페이지로 만든 우산을 챙겼다.


책이 걷고, 책이 발을 옮겼다. 책은 고개를 젖히고, 접힌 종이가 고개를 들어 숨을 쉰다. 책이 안에서 말을 걸고 책이 밖으로 노래를 불렀다. 책이 책의 손을 잡고, 잡힌 책의 손은 날 조용히 만졌다. 어둠에 젖은 하나의 문장이 입 돌아간 아줌마처럼 철벅였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어왔고, 거리에 반짝이는 간판들은 장난감총의 방아쇠를 자극했다. 실탄의 자상함이 갇혀 있는 성감대를 찔렀다.


책은 또 걷고, 발을 움직였다. 접혔던 종이의 페이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해 몸을 일으켰고, 삶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순간임을 깨우치고, 다른 종이의 벽에 기대어 순종하듯 녹았다. 부스러진다.


눈앞의 조명들이 책의 속삭임을 들추기를 힘겨워할 때, 집을 향했다. 집을 덮고 있는 문을 넘기고, 입구를 벌려 나를 넣었다. 기다리던 책이 나의 무례함에 찢어지며 웃는다. 책이 운다.


갑자기 난 이제 이부자리를 폈다.

누렇게, 좀 더 큰 글자가 새겨진, 그 장에서 그곳을 꺼내어 펼친다.

흐느적거리는 글자들은 부둥켜 앉아 제 의미를 잃고 있고, 그것보다 작은 글자들이 구석에 숨어서 그것들의 사연을 설명한다. 바른 자세의 설명은 그것들의 나체에 대해 부족했지만, 절묘하게 이해가 된다. 노란색의 꿈들이 무너지는 하품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즈음, 부둥킴의 글자들은 동시에 흩어지며 추운 날 이쁜 한 덩어리의 공기주머니 같은 편안함을 토해내었다. 행복으로 쓰여진 천 갈래의 단어들이 방 안에서 폭탄처럼 흘러 터진다. 분침을 밀어내던 파도가 행복의 파편들을 끊임없이 끌어당겼다. 등 긁듯이 흔적을 남겼다.


책으로 꽉 차인 나의 집에 별 빛이 쏟아졌다. 책을 베고 있는 나의 눈꺼풀 위를 밟아 주고, 눈물을 얼려준다. 별의 일생은 그 아침새벽에 불타 없어지겠지만, 책에 그려진 못생긴 그 별 하나는 매일 밤 나의 꿈을 행복으로 채웠다. 넌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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