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미술시간이었다. 기본색상으로 이루어진 크레파스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층으로 구성된 짝꿍의 화려한 크레파스 세트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크레파스의 색을 이용해서, 난 선안에 색을 채운다. 나무는 고동색이어야 했고, 풀은 녹색이어야 했으며, 빼곡히 흰색이 보이지 않기 위한 작업을 했다. 태양이 노랗게 칠해진다. 넓은 하늘을 그린날에는 하늘색 크레파스가 유독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걸 다 채우다가 미술시간이 끝나기도 했다. 흰 구름을 채울 색을 골라본다. 구름은 하늘색에 찔려가고, 그 위에 회색빛 헝겊이 덮였다. 내 손끝에 갈려진 선안에서, 생명의 호흡에 피멍이 들었다. 짝꿍의 하늘에 펼쳐진 그라데이션을 본다. 형형색색, 겹쳐지는 색상들에서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나지고, 소문으로 바뀌어간다. 풀 속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파스텔톤의 어린 시절 자장가를 부른다. 저공비행을 하는 참새가 이슬을 낚아챈다. 마흔 가지가 넘는 크레파스를 쥔손에 예술가의 흔적이 남았다. 검정색이 까맣게 타올라 산등성이를 밝혔다. 꽃이 꽃을 낳았다.
물감을 짠다. 물을 붓고, 붓끝으로 녹인다. 크레파스가 가둬버린 햇볕 위에 가을을 긋는다. 크레파스의 인자함에 단풍나뭇잎이 떨어진다. 붓끝의 갈라짐이 노을의 잔상을 남겼다. 굳어버린 강에 녹지 않은 살얼음이 생겼다. 살얼음 사이로 청록색 반지 하나가 떠 올랐다. 짝꿍의 그림 속엔 어느새 우주가 있다. 공중으로 떠오르다 못해 산 위를 뚫고, 나아가서 올라가서, 둥둥 떠다니는 유영을 시작했다. 여러 색들의 덧없음이 짙어지고. 어둠의 위대함이 가득하다. 별의 죽음이 아름답게 폭발하고 있었고, 추억빛의 포물선을 남겼다. 내 손에 잠든 마을하나가 우주를 쳐다보다가 우물 안으로 사라졌다. 색들의 파티에 친구들이 모여든다. 학교종소리가 울렸고, 파티는 막을 내렸다. 도화지에 물든 희미한 물감들이 뒷장에 새겨졌다. 우리는 보통 그 뒷장을 넘기고, 새 도화지에 무언가를 채웠다. 또 다른 우주를 담기 위해 창밖 하늘을 무심코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