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우리에게만 선택적으로 '물보다 진해지는 피'
이번 설은 1/31~2/2까지였다. 설날에 친가에서 겪은 경험을 글로 쓰기로 했는데, 날짜를 세어보니 너무 늦게 글로 쓰게 된 게 아쉽다. 아직 글 쓰는 기록이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이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 매년 동생들과 따로 친가에 방문하여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오곤 했다. 13살 때부터 동생들을 데리고 2호선 지하철을 탔다. 갈 때도 우리끼리 올 때도 우리끼리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적한 2호선 지하철을 차지하며 친가를 오갔다. 엄마는 그 동네는 꼴도 보기 싫다고 우리를 태워다 주지 않았으나 부모의 이혼과 조모의 사랑은 별개라며 명절마다 우리를 보냈다. 그래서 우리는 명절마다 지하철을 탔다.
할머니 댁에 가면 아빠는 없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할머니만 뵙고 다른 친척들을 만나고 세배를 한 후 세뱃돈을 받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이 친가에서의 불편한 명절을 매년 두 차례씩 감수해왔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뭐하는 짓이었을까?' 싶은데. 어쨌든 어릴 때부터 시키니까 갔고 할머니는 매년 명절에라도 간절히 우리를 보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의 손주들을 향한 그리움이 결국에는 매년 우리의 지하철행을 확정 지었다. 할머니를 향한 애틋함에 불편함과 서먹함을 감수하고 친가로 향하다 보면 사실 대개 하루나 이틀은 견디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이혼 후 아빠와 전혀 왕래가 없는 우리로써는 몹시 서먹하고 어색했다. 사실 그 이상이었지만.
그리고 올해의 설은 코로나 이후 2년 만에 뵈러 가는 명절이었다. 작년에는 코로나가 워낙 심각해 부러 찾아뵙지 않았으니 (사실은 좋은 핑계였다) 꽤 오랜만에 남동생과 둘이서 또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할머니는 도착한 우리를 보며 반가워하신 후 점심을 차리기 시작하셨고, 곧 작은엄마와 작은 아빠가 오셨다. 거의 5년 만에 만나는 친척 남동생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아침 같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티브이를 보며 간간히 대화했다. 그러나 작은엄마는 조용히 안방 밖으로 나가 할머니와 둘이 전을 부치기 시작하셨다.
안방에는 작은 아빠와 친척 남동생, 그리고 남동생과 내가 있었다. 올해로 26살이 된 어른 여성(?)인 나는 몸은 멀뚱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안방 침대에 앉아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몹시 어색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도 나가서 도와드려야 하나?
이놈의 명절. 할머니는 당연한 듯 다른 집 딸과 집안일을 하시고 작은 아빠는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너무 불편했다. 남들에겐 당연하게 여겨질 풍경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편했다. 남동생들은 마치 자기 자리를 찾은 듯 편안-히 아이패드를 하고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행동이 나에게는 마치 가시방석처럼 느껴지는 게 허탈했다. 나가서 주방일을 돕지 않으면 나는 '눈치 없고 이기적인 아이'인 것 같았다. 민족 대명절에 할머니 댁에 와서 쉬는데도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기묘하고 기분 나쁜 느낌.
스스로 가장 불쾌했던 건, 나는 무엇이 옳은지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게 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틀린 게 아닌데 눈치를 보게 된다. 내 일이 아닌데 내 일처럼 느껴진다.
아마 외가였으면 나와 여동생은 반찬들을 나르며 남동생에겐 상을 펴고 수저를 놓으라 지시했을 것이다. 누워있는 외삼촌에게는 동생이 보고 배운다며 일어나 뭐라도 하라고 닦달했겠지. 밥을 다 먹은 후에는 상을 치울 때 작은 것이라도 함께 역할을 분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손주들과 아들은 안방에 수납해둔 채 작은엄마와 둘이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색하고 서먹한 친가에서 안 친한 친척들 사이에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그곳에서 나 홀로 '주방일을 하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스스로를 '눈치 없이 주방일을 하지 않는 여자'가 아니라 '같은 손주'라고 결론지었다. 추운 겨울날 환기를 위해 현관문을 열고 전을 부치는 작은엄마가 안타까워 그곳의 분위기를 바꿔볼 수 있을까도 고민했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작은엄마에게 그나마 위안은 내가 가서 교대해주는 것뿐 일터인데 나는 어른들과 같은 선택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작은엄마가 전을 부치는 게 힘들다면 사실, 그녀의 남편이자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뒤집개를 잡으면 될 일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해결하려고 나설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건 그들의 역할분담에 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별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씁쓸히 앉아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밖에서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셨다. 000!
화들짝 놀라며 올 게 왔다 싶어 나가 보니 할머니께선 나에게 작은엄마와 교대 좀 해주라 말씀하셨다. 작은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나를 들여보내려 하셨고,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도와드릴게요. 교대해드릴게요."라며 무조건 반사로 쩔쩔매고 있었다. 사실 안 시키실 걸 알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내린 결론이 무색하게 마치 뭔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할머니가
우리 00 이는 전에 내가 사과 깎는 법 가르치려 그랬더니 "할머니 저는 저한테 과일 깎아주는 남자 만나려고요."라고 그랬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구나.. 그걸 여기서 이렇게 꺼내시다니... 황당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할머니의 손녀인데 뭔가 시집살이를 하는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말씀에
할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요즘 젊은 애들은 다 이렇게 대답해요.
라고 새침하게 대답해버렸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턴 돕겠다는 나의 말에 할머니와 작은엄마가 함께 손사래를 치며 마음에도 없는 들어가 쉬라는 말만 반복하시는 게 아닌가. 아마 할머니께서 과일 깎는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내가 더 쩔쩔매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어쩔 줄 몰라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말대꾸를 해버려서 나를 대하기가 어려워지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턴 더 장관이었다. 두 분 다 입을 모아 나에게 갑자기 "아냐 아냐 너 옷에 묻어~"라고 여러 번 말씀하기 시작하셨고 그다음엔 할머니는 "우리 공주는 들어가 쉬어라~"라고 화룡점정 마무리를 지으시는 게 아닌가.
공주라니? 나는 지금까지 태어나 26년 동안 단 한 번도 집안에서 '공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 명절 전까지는. 공주라는 호칭에 충격받으며 안방 문을 열었더니 거기에는 또 널브러져 쉬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럼 얘네는 왕자들인가? 재차 황당했다. 쟤네는 그냥 쟤넨데. 그냥 손주인데. 나는 나가서 주방일을 하지 않으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어하고 대접만 받고 싶어 하는 공주인 거구나.
할머니와 작은엄마가 눈을 피하며 "옷에 묻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그날 아침 편한 후드티를 입을지 말지 고민하다 그래도 2년 만에 명절날 뵙는데 어른이 보시기에 후줄근하게 가지 말자 싶어 침대에 굴러다니던 가디건을 골라 입고 온 게 생각이 났다. 그럼 나는 와서 전 부치기 불편하지 않게 버리는 옷으로 후줄근하게 입고 오는 게 맞았던 건가? 이게 맞아? 세상에. 그래도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 싶어 나름 신경을 썼던 작은 마음이 알고 보니 눈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걸 알아버려서 웃음이 났다. 와우.
아무튼 나는 그 가디건을 고르길 여러모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입고 온 후드티도 아끼는 옷이었다.) 그리고 이번 명절을 통해 할머니에게 '손주'가 아니라 '공주'로 거듭나게 되었다. 친구들과 통화하며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한 친구는 깔깔 웃으며 내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공주로 바꿔두겠다고 즐거워했다.
그 친구의 조언대로 방에 들어가며 "공주 퇴장-"하고 큰 소리로 외쳤어야 하는 건데. 사실 '다음엔 그래야지'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날 공주 취급에서 끝나지 않고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보다 9살 어린 막내 남동생에게 "우리 장손-"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며 보란 듯 대견해하시던 우리 할머니. 삼 남매 중 막내에게 장손 소리를 하시다니. (막내 남동생을 장손으로 칭하신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어여쁜 우리 손주' 목록에서 나가게 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손주가 아닌 공주로 꾸역꾸역 할머니를 뵈러 갈 필요가 있을까?
모두에게 '명절'은 결국 대체 뭘까? 이번에 할머니 댁을 다녀오면서 나는 한없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공주로 거듭나기도 했고. 전을 부치던 작은엄마에게도 인고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안방에서 데이터 없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남동생은 집에 가고 싶어서 거의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릴 때는 내게 예쁜 원피스를 만들어 주시고 늘 나를 대견해하셨던 우리 할머니.. 프라이팬 한가득 떡볶이를 만들어주시고 부침개를 부쳐주셨던 할머니..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걸까? 근데 만약에... 내가 결혼을 해서 시댁이 생긴다면 명절에 그곳에서 나는 뭐가 될까? 공주? 시녀? 상상해보니 더 끔찍하군.
할머니 댁이든 시댁이든 공주나 시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곳에는 가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앞으로 할머니 댁을 가지 않아도 되고 결혼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더 좋은, 더 지혜로운 방법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라고 희망을 가질 순 없을까? 그날까지 나도 이제는 크고 작은 '미움받는 일'에 좀 더 익숙하고 노련해질 필요는 있겠다 싶다. 미움받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