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질(본 상품)과 양념(파생 상품)의 충돌.
얼마 전 기고한 글에서 닭고기 요리의 예(중요한 것은 육질인가 양념인가)를 들며 현재의 프로스포츠 흥행 광풍은 육질(경기 콘텐츠, 본 상품)보다는 팬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양념(유행, 파생 상품)에 의한 것이란 의견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육질을 선호하는 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콘텐츠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이들간의 충돌과 마찰은 언젠가는 터질 수 밖에 없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한정된' 경기장 좌석의 점유를 놓고 육질(경기 콘텐츠)을 선호하는 팬들과 양념(팬덤, 응원문화 등 유행)을 선호하는 팬들 간의 불협화음이 조금씩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극렬스러운 일부는 (극심하다고 알려진)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조차 많은 이들의 눈살을 지푸리게 만들었던 소위 말하는 '알박기'를 시전하여 다수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난생 처음 경기장을 방문하더라도 마치 터줏대감인냥 자유롭게 응원문화를 즐길 수 있는 프로야구와는 달리 프로축구에는 서포터즈를 중심으로 하는 응원 활동이라는 특유의 문화가 있습니다. 양념(유행)보다는 육질(경기 콘텐츠), 선수보다는 팀을 우선시하는 이들 서포터즈는 팀을 든든히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신규 진입을 희망하는 팬들에겐 일종의 진입장벽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진입장벽이 없다시피 한 프로야구에 비해 프로축구는 상대적으로 (양념을 즐기려는) 2030 여성팬들의 비율이 현저히 낮습니다. (아래 통계 참조)
*남녀 팬 성비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조사자료, 2023)
프로야구 36.2(남) : 63.8(여)
프로축구 62.0(남) : 38.0(여)
이로 인해 프로축구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육질과 양념을 제각기 선호하는 이들 간의 갈등 발생과 충돌이 비교적 빠르게 발생했습니다.
구단 입장에선 참으로 난감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장에 (유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가득 채우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 미션이기 때문이죠.
프로스포츠를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시차는 있을지언정 프로야구에서도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경기장을 찾는 모든 이들이 그저 응원문화에만 심취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과거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 등으로 지금보다 더 한 야구 흥행 광풍이 불던 시절, 사직야구장 앞은 경기 시작 3~4시간 전부터 응원단석 앞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경기장에 근무하는 지인(매점 스태프 등)들에게 부탁해 좌석을 알박기 하는 등의 편법을 시전하기도 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불공정 경쟁)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고 팬들 누구나 공정하게 관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는 대표님께 품의를 상신하여 사직야구장에 국내 최초로 내야 전 좌석 지정좌석제를 도입한 바 있습니다. (2009년, 도면 참조)
덕분에 사람 대신 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땡볕 아래에서 3~4시간씩 입장을 대기해야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죠. (갈등의 해소, 타 구장으로 지정좌석제가 확산된 것은 저의 기쁨)
오늘날의 프로야구는 당시 제가 마주했던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 즉 앞서 말씀드렸던 육질과 양념을 제각기 좋아하는 팬들간의 갈등과 충돌이라는 문제를 근 시일 내에 겪게 될 것입니다.
이미 야구에 대한 담론을 깊이 있게 주고 받는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육질을 선호하는 팬들의 (양념에 끌려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 대한) 불편한 목소리가 조금씩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Check and Balance.
롯데자이언츠에 재직하던 시절 장병수 대표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말씀입니다.
KBO와 프로야구 10개 구단은 과연 향후 어떠한 행보를 보이게 될까요?
현재의 얻어걸린 성공에 만족하며 안주할까요, 아니면 새로운 위협에 선제적으로 대응할까요?
항상 관심있게 지켜보며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충실히 고민하고 또 실천하겠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지정좌석제(안)을 기획하던 당시 제 자리입니다. ^^
*영상 캡쳐 : 크랩(KLAB)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