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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늙어가는 시간'에
억울한 마음이 들 때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을의 전언을 기다리며!

by 이림

문득 내 늙어가는 시간에 억울한 마음이 들 때면,

지난 시절 오랫동안 머물렀던 설악산의 산장의 숱한 시간을 산에서 봤던 자연을 떠올려 보게 되지요.


설악의 산들에 봄날이 오면 그 빳빳하던 나뭇가지에 보드라운 어린잎이 나고, 새들마저도 즐겁게 노닐었지요.

여름이면 초록으로 물들어 기세 좋게 무성해지다가 도, 계곡 개울물에 발 담그는 아이들의 소리에 살짝 그늘만 남기고 도망가기도 하지요.

화려한 가을이면 오색 빛 단풍으로 자태를 뽐내던 숲엔 온갖 기묘한 자태를 품은 버섯들이 가득했지요.

겨울이면 낙엽이 빈자리를 채우던 나뭇가지 위로 흰 백설의 눈꽃도 누군가에게 사진 한 장으로 남기고 떠나가지요.

그리곤 자연의 모든 것이 수그러들어 빈 가지로 남아 돌아가잖아요!

어디로든 다시 돌아가 버리는 건, 결코 초라한 일만은 아닌 것이겠죠.


다시 찾는 설악의 정경은 여전한데,

늦은 가을아!

넌 너무 빠르게 지나니 열흘 일찍 출발해야 해!

빠른 겨울아!

너는 느리게 지나니 열흘 늦게 출발하는 게 맞아!

아직은 낮에는 마지막 남은 늦여름의 흔적이 가을을 시샘하는지 한낯햇빛은 그 남은 저력을 보이는 듯, 여전히 따스하다.

한낮에 목덜미로 후끈하게 불어오는 끈끈한 바람도 등허리를 스미는 땀방울도 이전 같지 않다.

창밖엔 끝 가을을 넘어 이른 겨울이 다가오는데, 여전히 한낮 햇볕은 따갑고 한가롭습니다.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물드는 가을 산행을 떠나는 계절입니다.

이제 홀로 마지막 열차를 타고 마지막 남긴 달력 한 장을 넘기며 겨울로 이동 중입니다.

어느새 회한이 가득 찬 세월의 무상함과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열차에 몸을 실어봅니다.

이번 산행에 본 단풍은 정상에 오르기 전, 이미 가을을 넘어 성큼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내게도 과연 푸른 하늘을 볼 가을은 올는지!

혹시 모를 기억 속에 남은 늦가을의 ‘매직’을 기대하며 먼 곳을 향해 기웃거려 봅니다.


가을 아!

너는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열흘 늦게 출발해야 해!

아파트 사이를 넘어 시원한 바람을 몰고 오기나 할 건가?

시월이 지나면, ‘가을 매직’과 함께 마법처럼 청량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되지.

가을은 낙엽의 숙성의 시기인데, 이렇게 스쳐가 버리는 게 얼떨결에 지나친 내 청춘과 같지 않는가!”

강물은 흐르고, 파도는 번지고 거침없이 다가오지.

그 이유는 계절의 정점에서 다음 순간을 떠올리고 사색의 문턱을 넘어서는 거 아닌가.
가을은 더위뿐 아니라 생명력을 발휘하던 여름의 모든 것들이 시들기 시작하는 계절이니까.

그리고 진한 추억이 깃든 설악의 마지막 그 여름날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건만,

여름아!

아직은 낮에는 마지막 남은 가을날의 서늘한 더위로 그 남은 저력을 보이고,

지난여름이지만 여름은 청춘의 열정의 계절인지라 푸름은 뻗고, 열매는 자라고, 솟아났지.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 아래.’ 햇볕은 따갑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드는 청량감도 잠깐이고

여전히 머릿속은 안개 낀 듯 멍하지.
텃밭 건너 산등이 기슭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어갔지.

고은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에 타고 들어간 바람들도 알갱이 이빨을 깨물고 빠져나오지.

거기에 감나무는 색을 바꾸고 이파리도 까칠해지지.

아마 과실수는 예년과는 다르게 달게 익어갈 것이고 나무들도 제 몸을 빚어 자식을 낳는 일이 그런 성싶어지는 계절이지.


이제 한발 물러나 더위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이 아니라 계절에 다가가 여위고 사위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바라만 보게 되네.

여름 한복판에서 지켜본 단풍과 가을 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렇게 흘린 땀이 가을에 어떤 결실로 돌아올지, 다가오는 가을의 조용한 숨결을 마음속에 품으며 시간의 흐름을 누리는 게 아닐지!

꿈날 같았던 한여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대, 시원한 밤길산책을 즐기는 잠시 머물다가 가버린 여름날의 허망한 잠결 같지 않았는가!

이제는 지난 것들을 거두어들여야 할 때임이 분명하기에 아쉬워하지도 섭섭해하지도 말아야지.


아! 이렇게 다시 가을 타는 모양이네.

이제 시월을 지나 낙엽마저 사라지는 가을마저도 훌쩍 지나겠지!
오늘도 아직 받지 못한 당신의 마지막 전언을 기다리고 있지.

어쩌면 도착하지 않을 소식을 다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다시 돌아온 나는 거실바닥에 누워서 지나간 노래를 몇 곡 듣고 더러워진 옷가지를 빨래하고 먼지 묻은 가방마저도 씻고 말리지.

이번에 맞는 계절엔 아무것도 심고 거두지 못했지만 그 무엇도 더 이상 자라지 않네.

죽어버린 나무처럼 이 계절을 지내고 그저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버팀 막대응이지.

이 마지막 시간마저도 통째로 날 지나 비껴가 버리네.

그렇게 이 가을마저도 겨울 위 문턱에 서 있네.

당장은 병원 가는 일과 건강을 돌봐야 하지만 그런 일상은 삶의 새로운 한 국면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겠지.

끝 가을날의 한낮의 볕은 아직은 따스해서인지 걸어둔 빨래가 뽀송하게 마르네.

그리곤 거둬들인 양말과 속옷, 티셔츠를 가지런히 다 개어놓곤, 하늘만 쳐다보지.

허긴, 느린 자들은 가장 먼저 움직이는 자들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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