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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대신 유치원비를 쓰는 부모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 야망계급론

by Applepie

몇년 전 봄날, 나는 지금 근무하는 직장에서의 첫 회식에 참여했다. 이 학교에 신입교원으로 온지라, 주변엔 모두 서먹서먹한 선배들 뿐이었다. 어색한 공기 가운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선배샘이 내게 물으셨다.

"자기는 애가 몇살이야?"

-다섯 살이에요.

"어머 유치원 다니겠네. 어디 유치원 다녀?"

-ABC 영유 보내요.

"음, 그럼 아침에 애 등원은 어떻게 시켜?

-아침에만 등원 도우미 써요. 이모님이 애 셔틀 태워주세요.

"그렇구나. 자기 혹시 남편은 뭐해?"


내가 받은 일련의 질문 속에서 나는 평가당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동시에 아무 정보 없이 처음 만나는 사람의 사이즈를 재는 수단으로 저 질문들은 얼마나 정교한 것인가 하는 감탄마저 나왔다. 후에 알게 되었다. 저 질문들은 나의 소비행태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또한 '야망계급'의 소비와도 비슷하다는 것을.

물론 그 선배님은 야망계급이 뭔지 모르셨을 것이다. 그땐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되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용어를 모르더라도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알 수 있다. 다른 계층과 '구별짓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소비 양식이 어떠한지 말이다.


제목의 '야망계급'부터 정의해보자. 작가는 이 용어를 100여년 전, 사회학자 베블런이 소개한 '유한계급'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베블런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데 특정한 재화를 사용한다는 '과시적 소비'개념으로 가장 유명하다. 베블런의 비판 중 많은 부분은 쓸모없고 기능적이지 않은 품목들인 물질적 재화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헛되이, 끊임없이 과시하는 부유하고 게으른 집단으로서 '유한계급'을 겨냥한 것이었다. (P.16)

베블런의 비판에 의하면, 유한계급 소비의 핵심은 '쓸모없음, 과시적'이었다. 쓸모는 없으나 굳이 비싼 수세공 은수저를 사용하고 여성들의 경우 코르셋을 입으며(노동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지위를 과시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이 많이도 바뀌었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쓰고 한 세기 뒤, 기술의 대대적인 변화와 세계화는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산업혁명과 제조업의 발전은 중간계급을 창출하고 물질적 재화의 비용을 낮추어 과시적 소비가 보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동시에, 유한계급은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되었다. 이 엘리트는 능력주의 및 지식과 문화의 습득에 마탕을 두며, 예전에 비해 경제적 지위로 뚜렷하게 정의되지 않는다.(P.20)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에는 세 가지 중요한 추세가 있다. 첫째, 수많은 물질적 소비재의 접근성이 낮아지고 그러한 소비가 공공연해진 탓에 야망계급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 덜 알려지고 암호화된 상징을 찾아냈다. 둘째, 이제 '유한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경제가 재구조화됨에 따라 토지 소유가 아니라 지적 능력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이 높이 평가된다. 이 노동시장의 엘리트들은 상향 이동을 신봉하고 자녀들도 자신과 똑같이 누리기를 원한다. (중략) 오늘날의 노동시장 엘리트들, 특히 야망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육아, 가사, 정원관리, 사치스러운 휴가 등에 상당한 돈을 지불하는 식으로 여가시간을 확보하며 또한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돈을 퍼붓는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점으로, 물질적 소비는 더 이상 교육이나 은퇴, 의료같이 중요한 지출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보다 우선시되지 않는다. 교육, 은퇴, 의료등에 대한 소비는 모두 높은 가격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동시에 야망계급 지위를 재생산하고 이들이 나머지 전체와 자신들을 한층 더 분리하는 결정적인 통로다.(P.93~94)

100여년 전처럼 조상이 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관리하며, 노동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 살수 있는 유한계급은 이제 많지 않고 그들이 독점하던 과시적 소비는 산업화와 대량 생산으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명품 매장 오픈런을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가? 부자가 아니더라도 과시적 상품들-브랜드 의류, 자동차, 대형 TV등-을 누구나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신, 요즘의 엘리트들은 경제적 자본보다 더 습득하기 어려운 문화적 자본으로 무장한 소비를 하는데, 이것들은 시간을 들여 쌓은 지식과 내부자들끼리의 정보공유를 통해 형성된 것들이기 때문에 계층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다가가기 힘들게 되었다.


야망계급이 특정한 직물이나 목재, 식품을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 우수하고 환경친화적이며 인간적인지에 관해 습득한 지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야망계급이 먹는 것(미식, 유기농, 인간미가 풍기는 집밥), 식료품을 사는 곳(농민 직거래 시장과 홀푸드), 입는 옷(유기농 면과 라벨 없는 미국산 제품), 이야기하는 주제(월스트리트저널 기사나 시리얼같이 화제가 되는 팟캐스트)등 모든 면에서 이런 미묘한 계급의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중략) 많은 야망계급 성원들은 표면상 '능력주의 엘리트'의 일부이거나 적어도 그런 의도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신호들은 야망계급의 성원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지위를 얻는 데 필요한 정보비용(대학 교육, 전문 서적 읽기, 식료품 생산과정에 관한 최신 정보 습득)도 드러낸다. (P.103~104)

새로운 야망계급은 명품으로 무장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농 채소와 치즈로 만든 샌드위치를 사고 뉴욕타임스를 구독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계층과 구별짓는다. 여기서 사실 조금 찔렸다. 내가 지향하는 소비도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형마트를 선호하지 않은 대신 동네 유기농 매장에서 식재료를 사고 신문을 구독해 읽으며 내가 하는 소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운동 강습료이다. 나는 경제적 능력이 크지 않기에 베블런 시대의 관점으로는 절대 유한계급이 될 수 없으나 오늘날의 야망계급의 소비와는 닮아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스스로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세계적 트렌드임도 깨닫게 되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비과시적 소비 중, 육아에 관한 부분이었다. 야망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육아에 돈을 더 많이 쓴다는 것이다.

상위 소득집단은 또한 총지출에서 더 많은 비중을 육아에 할애한다. 다른 소비보다 육아를 우선시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중간 계급에 비해 지출 비중으로도 2~5배를 육아에 더 쓴다. (P.117)

비앙키는 20세기 중반에 비하자면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대체로 부모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일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부모들이 '가족 지향적'이었던 1960년대보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아이와 보낼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려는 부모들의 시간 관리를 보면 비과시적 소비가 이를 가능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비앙카는 오늘날 미국 가정이 가사 서비스(가령 가사도우미와 정원사)를 활용하고 있으며 부인이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남성들이 가사노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120)

아이를 낳고 휴직 후 돌아간 학교에서 이런 것을 느꼈다. 아이들의 어휘력이나 집중력이 부모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대화를 얼마나 나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모와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은 아이일수록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도 긴 경향이 있기 땜에 고작 2학년이어도 그 아이들의 문해력이나 수업 이해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야망계급 성원들은 그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인지 직업을 가진 여성일지라도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그 배경에는 가사도우미 등을 씀으로써 노동집약적 산업을 외주화하며 절약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시간이 경제적으로 점점 더 소중해지는 부모들이 왜 더 많은 시간을 '무상으로' 내주는 걸까?(즉, 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걸까?) 이 학자들은 그 답이 '코호트 과밀'에 있다고 본다-오늘날 엘리트 대학에 들어가는 게 한층 어려워진 탓에 엘리트 부모들이 자녀를 준비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중략) <인구학>저널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부모는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돈도 더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10대 자녀에게 집중적으로 쓰였지만, 1990년대 이후 부유층 가정의 경제적 자원 대부분은 자녀가 6세 미만일 때와 20대 중반일 때 집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요컨대 토요일 아침에 유아용 바이올린 교습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정말로 프린스턴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P.169~170)

과거에 비해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인구가 많아지며 대학 입시는 더 치열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입시에서 우월한 입지를 일찍부터 선점해주기 위해 야망계급 부모들이 육아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쓴다는 것이다. 많은 돈을 쓰는 시기도 흥미롭다. 6세 미만일 때와 20대 중반일 때. 아마 6세 미만엔 비싼 유치원을 비롯한 유아 사교육에, 그리고 20대 중반엔 대학이나 대학원 학비, 유학 등의 비용일 것이다. 나 또한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교육비 지출이 줄었기에 이 부분에 공감이 갔다. 영어유치원 교습비가 초등 온갖 사교육비를 합친것보다 더 비쌌으므로.


야망계급 육아의 거대한 소용돌이인 엘리트 사립 유치원을 생각해보라. 이 유치원의 연간 수엽료는 1만 달러에서 4만 달러에 이르는데도 입학하려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 마흔다섯 살의 아빠들은 오후 5시까지 아이를 픽업하러 가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냅다 달린다. (중략) 아이비리그 학위를 가진 전업주부 엄마들은 자녀가 학교에 있는 동안 유기농 채소를 사고, 부모들끼리 아이들의 놀이 약속과 음악 강습을 잡는다. 라루가 말한 집중 양육에 푹 빠진 이 부모들은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어떻게 하면 아이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할지에 관해 생각하며 보낸다. 하지만 이들은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과 다른 결정을 하는 이들을 평가한다. 각자의 결정이 결국 엄마가 누리는 경제적, 사회적 자유의 여부에 좌우되며, 이 자유는 거의 전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위치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P.189)

마치 우리나라의 모습을 묘사한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아이가 최소한 나와 같은 지위를 누리게 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찬 고학력 고소득의 부모들의 묘사가 우리 나라와 엄청나게 닮아 있지 않은가? 내가 아는 야망계급의 엄마들 역시 전문직 자격증이나 대기업 근무 경험, 해외 유학 경험등을 갖고 있으나 지금은 그것들을 뒤로 한 채 육아에 집중하고 있으며 아이가 없는 자유시간에도 아이 교육 얘기를 주로 나누곤 한다.

또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야망계급의 이런 비과시적 소비가 계층간 불평등을 더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가 육아를 하며 내리는 주체적인 결정이라는 것이 사실은 내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뼈를 때린다. 내가 만약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여러 교육서를 읽을 지적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근무시간이 유연한 직장을 갖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아이를 위해 하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니 말이다.


하루 중 정말 많은 시간을 '소비'를 고민하며 지내는 것 같다. 현대인이라면 다 그렇지 않을까. 나의 소비가 나의 정체성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엘리트 집단의 세계적인 소비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어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나는 비과시적 소비(특히 육아에 국한된)에 집중하여 기술하였는데 이 밖에도 과시적 생산, 도시와 야망계급 등 흥미로운 내용이 더 많으므로 이 글을 재밌게 읽으셨다면 '야망계급론'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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