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 내려오면서 엄마와 해보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막내 올케와 대화 중 힌트를 얻은 '바느질'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었다.엄마는 결혼 전 한복 바느질을 배웠고, 결혼 후 한복 바느질로 돈벌이를했으며, 서울로 상경한 후에는 오랫동안 재봉틀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니 엄마에게 바느질이 가장 자신 있는 일일 것이다. 엄마의 머릿속에선 이미 사라진 기억일지라도, 엄마의 몸은 바느질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엄마랑 같이 소곤소곤 이야기하며 바느질할 생각에 특히 곧 태어날 지인의 늦둥이 아가에게 배냇저고리를 만들어 입혀줄 상상을 하면서, 혼자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큰언니도 내 아이디어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고, 필요하면 언니네집에 있는 재봉틀을 가져가서 사용하라고도 했다. 엄마는 손재주가 아주 좋은 분이었다. 그러니 바느질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손으로 하는 것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한껏 고무되기도 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김제에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몰랐던 아니 그냥 모르고 싶었던 모습이 현실이었음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엄마의 모습을 자세히 보는 게 처음이었나 보다.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반찬을 만들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번 식사를 하려면 엄마가 냉장고를 최소한 스무 번은 열었다 닫는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엄마는 집안일에 있어 당신이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점을 힘들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빠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할 때도 뭐가 됐든 당신도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에, 처음엔 엄마의 손놀림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몰랐던 내가 엄마에게 식재료를 썰어달라고 했다가 엄마가 검지 손가락을 베어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피가 철철 나는 엄마 손가락을 지혈해주려 했으나, 엄마는 극구 괜찮다고 행여라도 아빠가 알게 될까 봐 겁을 냈다. 아빠가 알면 야단을 친다고 했다. 그래서 지혈도 제대로 안 하고, 멈췄던 일을 다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치 어른에게 들킬까 봐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한 어린아이처럼. 나중에 엄마 손을 자세히 보니 엄지손톱 하나도 거의 없었다. 아마 내가 없을 때 음식을 만들겠다고 식재료가 아니라 당신의 손톱을 썰었나 보다. 엄마의 손은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 손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의 모든 행동은 아빠를 향해 레이더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행동으로 시작해서 엄마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아빠의 지적질이 시작되면 심하게 기분이 상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 말에는 대꾸도 안 하고 어떨 땐 정 반대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은 내 표정을 살피고, 내가 난처할까 봐 마지못해 아빠의 말을 들어주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의 안전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세워놓고, 엄마의 행동을 일거수일투족 통제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잠깐 마당에 나갈 때조차 어떤 신발을 신을지까지 명령하고 지시했다.
엄마는 아빠가 없는 곳에서 입버릇처럼
"이 집에 나는 없어. 니 아빠랑 시종만 있어."
"니 아빠는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 혀"라고 중얼거렸다.
지금껏 나는 지인들과 혹은 상담사와 가족이야기를 해야 할 때 '우리 아빠는 자식들을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며 아빠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그랬다. 아빠는 우리들을 물리적으로 때린 적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아빠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냈는지 여러 입을 통해 들어왔으므로, 그 고단한 삶의 분풀이를 자식들에게 하지 않음을 감사했었다. 그런데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닌 것을. 아빠는 얼굴표정으로 분위기로 집안을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서적인 폭력'을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늘 휘둘러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지금도 그 폭력이 진행형이란 사실이 비극 중에 비극이다.
내가 11살 때 엄마는 반대하는 아빠를 반 강제적으로 설득해 엄마의 주장대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종갓집 큰며느리가 17년 동안 모시던 시부모를 팽개치고, 자식을 다섯이나 데리고, 겨우 쌀가마 몇 개만 챙겨 서울로 터젼을 옮겨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살얼음판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되면 늘 긴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집안을 정리하고, 자식들을 단속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행여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할 그 어떤 건덕지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집안의 불문율이 된 것이다.
아빠가 웃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렇다. 무엇보다도 아빠는 누구에게나 질문하지 않았다. 무조건 아빠맘대로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변명하는 지질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아빠에 대해서는 관대했을까? 엄마에 대해서는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엄마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지만, 아빠에 대해서는 감사까지 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렇게 정읍에 와서 일주일에 두세 번 보는 아빠는 엄마의 행동을 숨 막히게 통제하고, 여전히 웃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으로 엄마의 생각까지 통제하는 사람인데. 이런 아빠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면서 조금씩 어릴 적 내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때의 나는 아빠를 공포스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가 무서워 그랬던 것일까?'
'아빠는 때린 적이 없으니 감사해야 한다고. 대신 공포스러운 아빠에게서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 엄마를 미워하고 서운해했던 것일까?'
'우리를 단속한 엄마를 아빠와 공범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빠를 보면서 나는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내 아이들을 아빠처럼 통제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본다. 내 아이들에게 무서운 엄마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정서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이 자율성이 없는데 존엄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무리 치매환자일지라도 인간의 존엄마저 갖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도대체 엄마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단 말인가?'
아빠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불합리한 사건들과 폭력이 지금의 아빠를 만들었을 테니까. 아빠도 아빠의 엄마나 아빠에게 그토록 통제를 받았을 것이고, 언어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그것들이 켜켜이 쌓여 나이테로 온몸에 박혀있을 것이다.
'이 견고한 악순환의 고리에 안착해 있는 아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나만이라도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나오도록 나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 최선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