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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Aug 29.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7

고추장(자연에서 얻은 생명)

물만 주면 크는 콩나물

 나는 고양시에 살 때도 종종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직접 길러 먹었다. 생명을 키우는 것은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지만, 반대급부로 생명을 키우면서 번뜩이는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연의 신비로움에 충만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정읍에 이사 올 때도 콩나물과 숙주를 키워먹을 생각으로 도구를 챙겨 왔었다. 3~4월은 콩나물을 기르기 딱 좋은 시기로 4~5일 정도면 콩나물이 썩지 않고 잘 자라서 수확할 수 있었다. 김제에 갈 때도 콩나물통을 들고 가서 그곳에 있는 동안 잊지 않고 물을 주었다. 다 자란 콩나물은 콩나물국밥을 만들어 부모님과 함께 한 끼를 맛있게 해결하거나 나물로 무쳐 아들과 비빔밥을 해 먹었다.

"파는 콩나물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요 콩나물 대가리의 고소함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이왕 농촌에 왔으니 채소에 대해 특히 매일매일 먹는 식재료에 대해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도서관에 가서 채소나 식재료에 관한 책을 몇 권 빌려왔다. 이때 읽게 된 마크로비오틱 연구가인 이양지 선생의 책에서 '아'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많은 도움을 받은 책들

 "나는 자연 일부입니다. 그런데 내가 자연 일부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연에서 얻을 있는 물과 공기, 음식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음식이든 모두 자연의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연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 음식은 죽은 음식입니다. 백미를 물에 담가두면 끝내 썩어버리지요. 하지만 현미를 담가두면 발아합니다. 현미가 생명력이 있는 음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자연의 생명력이 들어있는 음식을 먹어야 자연 일부가 있습니다.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생명의 빛을 냅니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양지의 하루 한 가지 채소요리 중)

사랑스럽게 싹이 난 현미

 이때부터 발아현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발아현미를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4시간 정도 물에 담아뒀다가 그 후론 채반에 옮겨 한두 시간에 한 번씩 새로운 물을 주고, 어두운 곳에 넣어두면 3~4일 정도 후에 1mm 정도의 아주 어여쁜 싹이 생겨난다.(콩나물 기르는 방법과 대동소이했다.) 처음엔 물 주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지만 나중엔 깜박하기도 하고, 긴 시간 외출을 해야 할 때는 냉장고에 넣어두기도 했으나 새싹은 여지없이 자라났다.  생명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 발아현미를 냉동실에 넣어두고 밥을 할 때 백미와 발아현미를 섞어서 밥을 짓는다. 밥을 지을 때는 다시마 물과 올리브오일을 넣으면 풍미가 좋아지며 영양분 섭취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소주 한 스푼을 추가해서 발아현미의 독특한 냄새를 잡기도 한다. 젊었을 때부터 당뇨를 앓고 계시는 아빠에게도 발아현미밥을 드시도록 했다.


 아빠는 국이든 물김치든 뭔가 국물이 있어야 밥을 드시는 식습관이 있으신지라 내가 정읍에 와서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만든 김치가 나박김치였다. 유튜브를 뒤져서 가장 쉽고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골라 도전해 보았다. 그런데 처음 만든 물김치가 익어서 먹어봤더니 어찌나 맛있던지 스스로 뿌듯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농촌으로 유학 온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물김치만큼 만들기도 쉬운데 유산균까지 풍부한 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열무를 이용하기도 하고 얼갈이배추를 이용하기도 하고, 제철에 구할 수 있는 각종 야채들로 물김치를 담그고 있다. 아마도 1년 후엔 물김치 달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때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만든 같은 듯 다른 나박김치

  4월 초에 남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일본 북해도에 있는 둘째 언니네로 갔다. 아빠에게 휴식을 주려는 언니의 배려였다. 낯선 곳을 힘들어하시는 엄마가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으나, 아빠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 이것 또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엄마가 계실 땐 손도 못 대는 여러 가지 일중에 한 가지인 냉장고 정리를 아빠와 했다. 더하기는 되고 빼기가 안 되는 엄마의 냉장고에서 엄청난 양의 고춧가루, 들깻가루, 엿기름, 메주가루, 매실청, 찹쌀가루 등등이 나왔다. 가판을 벌여도 될 정도였다. 나는 이 재료들을 보는 순간 '고추장'이 해성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어쩌자고 자꾸만 이런 생각들이 드는지 내가 나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느 순간 내가 고추장 재료를 검색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조청만 있으면 가지고 있는 재료들로 고추장을 담글 수 있구나!!!'


고추장을 담가 장독대에서 익히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언니집에 간지 며칠만에 집에 가고 싶다고 언니를 조르고, 한밤중에도 깨어나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치매가 걸리기 전엔 한번 가시면 몇 달씩 머물던 곳인데. 결국 엄마는 언니네에서 열흘 만에 돌아왔다. 이제 엄마와 함께 고추장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이 남았다. 고추장을 만들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어떤 재료를 얼마나 어떤 절차로 넣어야 하는지 잊어버린 엄마는 내가 잠깐 다른 걸 하는 순간 엄마 마음대로 재료를 넣어버릴 터. 고심 끝에 춧가루와 메주가루 그리고 소금을 넣기 전(前) 과정을 혼자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엿기름을 불리고 쌀가루와 함께 졸이는 과정은 집에서 나 혼자 이틀 동안 진행하고, 결과물을 들고 김제로 갔다. 엄마와 함께 계량해 간 소금, 메주가루, 고춧가루, 매실청을 넣고 고추장을 완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갑자기 매실청 넣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하시는 바람에 나중에 몰래 매실청을 넣는 첩보작전이 필요했다.

"이제 고추장이 장독대에서 태양보다 더 빠알간 빛깔로 햇빛과 맞짱 뜨며 맛있게 익어가는 걸 기다리면 되는 거다."


2024년 5월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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