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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Sep 12.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14

파업선언

<<파업선언문>>

오늘부터 엄마는 파업을 선언한다.

이유 : 정읍에 와서 엄마로서, 아들로서 역할에 대해 약속하였으나, 두 달이 한참 지난 오늘까지 대부분의 조항이 지켜지지 않아 부득이 파업을 결정함.


<<요구사항>>

 ** 아들이 정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라 **

 1. 장난감, 책, 학용품등을 사용하고 나면 정리 정돈하기. 

 2. 특히 과자등을 먹고 나면 봉지등을 바로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기.

 3.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위 요구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갈 것임

아들은 약속을 행동으로 이행하라~

이행하라~

이행하라~


동양화가가 그려준 아들

  정읍에 와서  아들과 서로 각자가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의논했고, 합의된 항목들을 친필로 써서 냉장고에 붙여놨다.  아들은 자신의 물건에 대한 정리정돈, 7시에 일어나기, 설거지 도와주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를 자신의 역할로 정했다. 설거지는 아들이 하겠다고 주장한 것으로, 굳이 내가 바란 것도 아니고, 아들의 필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안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꼭 지켜지길 바랐다. 레고를 좋아하는 아들은 거실과 부엌공간을 모두 사용해서 레고 피스들을 널어놓고 창작활동을 한다. 작은 레고 피스를 빨리 찾으려면 넓은 공간을 사용해야 한다는 아들의 주장을 최대한 수용해서, 작업 중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레고 피스를 집안 가득 널어놓을지라도 내가 흔쾌히 봐주었다. 작업이 끝난 후 정리만 하면 어두운 과거는 묻지 않는걸로.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건 내가 꼭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다. 주인집 유나아빠는 집 뒤편 산밑에 구덩이를 하나 파놓고, 그곳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 가려면 또리란 녀석을 지나가야 한다. 진돗개인 또리는 영리하기도 했지만, 사납기도 했다. 아들은 금세 녀석과 친해져서 그런지 지나가도 짖지 않았지만, 나는 근처에 있기만 해도 어찌나 가열차게 짖어대는지 또리를 지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일은 아들의 역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읍에 온 지 두 달이 지나고, 세 달도 한참이나 지난 최근까지 약속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이제껏 설거지는 '독수리5자매' 언니들이 방문했을 때 딱 한번 했고, 7시에 일어나기는커녕 거의 8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 겨우겨우 학교 셔틀을 탔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은 잘하다가 어느 날부터 안 하려고 온갖 꾀를 내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이 세 가지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되었지만,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것은 참다 참다 임계점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말로 하다 하다 지쳐서 아들이 학교에 간 후 내가 정리하고 청소기 돌리기를 한 달,

아들을 붙잡고 사정사정해서 아들과 내가 함께 치우기를 한 달,

정리 안 하면 용돈을 안 주겠다고 협박하기를 하루 이틀,

다시 다정하게 말하고 아들 손으로 치우게 하기를 일주일,

그러다가 어느 일요일 나는 나의 한계에 부딪혀 모든 걸 놓아버렸다. 파업선언문을 커다란 달력종이에 큰 글씨로 적어 아들 보라고 붙여놓고 안방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일요일 세끼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고, 아들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은 내가 잔소리를 안 하니 옳다구나 하고, TV를 보다,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보다, 만화책을 읽다, 집안 가득 레고 피스를 어지러 놓고 작품활동에 전념하다를 반복했다. 음식물 쓰레기통은 쌓여 가는 음식물들로 터져나가고 있었지만 그게 뭐 대수겠나 싶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들을 깨우지 않았다. 월요일이니 학교를 가야 하는데 말이다. 옆집 유나가 학교 셔틀을 타려고 나오길래 나는 유나에게 말했다.

"오빠는 아직 안 일어났어. 오늘 학교에 안 갈 모양이니 셔틀선생님께 셔틀 못 탄다고 전해줘~"

"왜요? 오빠 아파요?"

"모르겠어"

유나와 나의 대화를 들었나 보다. 아들이 우당탕 일어나 폭탄 맞은 머리로 시계를 보더니, 쏜살같이 옷만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나갔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뭔 일인가 싶어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하루종일 나는 레고 피스들과 아들이 먹고 치우지 않은 과자 부스러기들과 과자 봉지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는 집안을 그대로 보존했다. 발을 내딛을 공간조차 없어서 발가락으로 조금씩 밀어야 겨우 한 발짝을 뗄 수 있는 거실을 쳐다보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아들이 적어도 자기가 먹은 과자 봉지만이라도 그때그때 쓰레기통에 버리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했던 노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다 소용없다는 절망이 밀려왔다. 나는 농촌유학을 와서 아들과 둘이서만 지내면 가족이 모두 같이 살 때보다 소통이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은 나를 더 만만하게 여겼고, 행동은 자유분방해지다 못해 집안을 돼지굴로 만들어버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가르치는 게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책임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적어도 질서 있는 자유만이라도!!!!!'


 회사일이 끝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삶에서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아이들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 큰딸의 늦은 사춘기로 내가 큰 딸의 시야에서 밀려나면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처음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만이라도 가까이에서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시간 동안 오롯이 아들만을 사랑해 주리라 결심했는데 오늘은 아들이 이리도 미울 수가 없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나갔다. 나는 그때까지도 파업 중이라 참견 안 하고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빈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들어온 아들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엔 '어머니 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씌어 있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써온 사과문

그렇게 나의 파업은 아들의 사과문 한장으로 맥없이 풀렸고, 아들은 예전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나아졌다. 그 후로 아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종종 버려주긴 하지만, 강아지들이 나를 보고 더 이상 짖지 않기 때문에 이젠 내가 버리기도 한다.  

 

아들은 그날 이후 가끔 '엄마가 파업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 역할에 대한 파업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아들이 아들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언제든 엄마의 역할에 대한 파업에 돌입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엄마의 역할에 포함되지 않음을 분명히 해두고 말이다. 아들은 MBTI가 ENFP이고 나는 INTP이니 사실 정리정돈 못하는 것은 둘 다 비슷하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 할 모양이다.


2024년 5월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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