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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Sep 04.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10

"엄마 기차에서 못 내렸어"

 6월 7일이 학교 재량휴일이라 큰 딸아이가 정읍에 오기로 했다. 10시 8분에 신태인역에 도착한다고 했다.아침 일찍부터 부산했다. 한 달 만에 오는 딸아이를 맞이하기 위해 청소도 하고, 이불도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소독하고 신태인역으로 출발했다. 미리 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는 딸아이를 기분 좋게 해주려 했으나 맘 처럼 되지 않아 결국 역에 도착 전 전화가 울렸다. 딸아이가 도착해서 전화를 했으려니 하고 도착했냐고 먼저 물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기차에서 못 내렸어. 내리려고 했는데 문이 닫혀버렸어"라고 했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뭐? 그럼 다음역에서라도 내려"라고 핀잔과 짜증을 전화기 너머로 흘려보냈다. 


 차를 잠시 세워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정읍역으로 바꾸고 다시 운전을 했다. 이번이 초행길도 아니었다. 아빠랑 같이 온 적도 있고 혼자 기차를 타고 온 적도 있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아이를 픽업하러 가던 길이었다. '설마 기차에서 못 내릴 줄이야',

'꾸물거리다 못 내렸겠지', 

'아니 기차하나 못 내릴까? 그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

내 맘속에선 온갖 질책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다.

'그러니 학교 갈 때도 지하철을 놓쳐 겨우 2분 지각을 하는 거 아니겠어?',

'아이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까?'

... 

...



 아침인데도 차 안은 너무 더웠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데도 등에서 땀이 차고 온몸은 후끈후끈 끈적였다. 게다가 부정적인 생각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기분도 엉망이었다. 딸아이를 볼 생각에 한껏 설레었던 마음은 어느새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 딸아이 학교 상담 때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실패에서 배우는 게 훨씬 많으니 실패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실패를 해야 한다고.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이 학교에서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던가.학교에는 아이들이 실패하면서 배우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정작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라니. 이걸 알아차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진땀이 났다.

'나는 왜 아직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완벽을 요구할까?', 

'실패하지 않으면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로봇도 아니고 어떻게 매뉴얼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있는 이 일에 아이는 얼마나 긴장되고 두려울 것인가?', 

'기차표를 보자고 하면 어떡할까 걱정하면서 영겁의 시간을 보낼 아이가 아니던가?'

그제야 조마조마해하고 있을 딸아이의 마음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런 나를 또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실패를 허용하기 힘든 사람이구나',

'누가 나에게 이토록 가혹했을까?',

'혹 아무도 나에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얘기해주지 않았던 걸까?',

'실패하며, 또는 실수하며 배울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 포용해 주는 안전한 기회가 나에게는 없었던 것일까?',

'가정이나 학교에서 실패해도 지지받으며 하나씩 배울 수 있었다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좀 더 유(柔) 했을 텐데',

'나는 어떻게 하면 이토록 나 스스로에게까지 혹사당하고 있는 나와 화해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이런 생각들로 마음에 질서가 잡힐 무렵 정읍역에 도착했다. 


 딸아이는 기가 죽어있었다. 나한테 미안해서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기차역에서 못 내린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나는 들어주었다. 예전 같으면 '그거 다 핑계잖아'라고 얼굴에 써놓고 들었을 텐데. 오늘은 백지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들어주었다. 그리고 토를 달지도 않았다. 대신 딸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래서 오늘 중요한 뭔가를 배웠겠네!!!!!"

라고 말하며 안아 주었다.

변산 해변에서 딸과 함께



2024년 6월 8일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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