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란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고 했다. 나에게도 그런 방문객이 오는 것이다. 12년 전 아들을 입양하면서 내가 입양가족이란 정체성을 취득할 때 아들과 함께 선물로 얻은 분들이다. 그해 토정비결에 귀인을 만난다고 되어있었을지도 모를 그 귀인을 두 명이나 만난 것이다. 두 언니는 그때부터 아들의 나이만큼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나의 인생 구석구석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져주며 내 삶을 지지해 주고 있다. 우리 셋은 모두 고양시에 살고 아들을 입양한 입양가족이고 안국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이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수기가 없는 정읍에서 매일 따뜻한 차를 만들어 먹을 때 쓰라고 전기포트를 미리 집들이 선물로 보내준 센스쟁이 언니들.
언니들에게 태양과 흙에서 맘껏 뒹글고 노닐어 자연의 은혜를 담뿍 받은 푸성귀들로 전라도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래서 겨우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볼록한 하얀 근육을 만들어낸 쪽파로 난생처럼 김치를 담았다. 새벽 3시만 되면 꼬끼오하고 울어대는 건강한 닭들이 낳은 청란을 유나네서 공수받아 준비해 놓았고, 향이 이토록 나무일 수 없는 물이 잘 오른 두릅을 들쳐놓았다.
새벽에 잠이 덜 깬 농부를 빨간 꼬마전구가 되어 길을 안내했을기특한 딸기도 사다 놓았고, 추운 겨울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을 그래서 쌉싸름한 고난의 향기를 가진 상추도 씻어 놓았다.
언니들은 한가득 선물을 안고 나에게 왔다. 집까지 오는 차 안에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지를 풀어놓으며 응석을 부렸고 언니들은 '그게 인생이야'라는 표정으로 들어주었다. 언니들은 마을 어귀부터 온몸으로 춤추며 반겨주는 환상적인 벚꽃터널에 환호했고, 강아지가 아니라 여우라고 우기는 나로 인해 강아지인 듯 여우인 듯한 우유와 치즈 또한 반갑게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공수해 놓은 청란과 하얀 근육이 볼록한 파를 본 언니가 두 팔 걷어붙이고 만들어준 파전은 천상의 맛이었다. 정읍에 내려오고 나서 이렇게 음식을 맛있게 많이 먹고 또 너무나도 시원하게 배설을 한 게 처음인듯하다. 이게 다 언니들 덕분이다.
주부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언니들이 하룻밤을 머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밤이면 쏟아질까 봐 무서울 정도로 출몰하는 수많은 별들로 깜짝쇼를 하고픈 욕심까지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 내가 힘들 때 언니들을 다시 불러올 비장의 무기로 아껴두라고 별들이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 몇 개만 반짝거렸다.
새벽에 온 힘을 다해 울어대는 닭들 때문에 언니들은 3시부터 잠을 설쳤다고 했다. 환영의 인사를 그토록 혁명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부탁을 했어야 했나 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따뜻한 두유를 직접 만들어 아침으로 대접했다. 그러고 나서 언니들과 함께 아들이 다니는 학교 견학을 했다. 교감선생님과 아들 담임선생님께서는 언니들과 나를 환대해 주셨고, 학교의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셨다. 언니들과 나는 '우리들이 이런 그림 같은 학교를 다시 다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난발했다. 요즘 아이들은 별 감흥 없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못 누린 자들(아들은 절대 알 수 없을)인 우리들은 대리만족해하다가, 부러워하다가, 감탄하다가, 흐뭇함으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언니들의 1박 2일은 내 안의 서러움과 억울함을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그 따뜻함으로 인해 얼어버린 듯 웅크리고 있던 내 안의 어린아이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는지 발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돌아가는 두 손엔 각자의 아들이 좋아하는 싱싱한 딸기가가득 들려져 있었다. 언니들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읍에 와서 냉이꽃을 처음 보았다는 고백을 단체톡방에 했을 때 언니가 해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들이 아니라 엄마가 농촌으로 유학 간 거네 ㅎㅎㅎ"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결혼 후 시댁의 일가 친척집에 인사차 방문했을 때의 일을 나는 지금껏 잊지 못한다. 나는 손님으로 방문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는 나를 무엇으로 여겼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처음 방문하는 집이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거란 생각으로 질문받을 준비를 하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도 곱지 않은 시선들이 앉아있는 내 몸을 휘감았다. 낯선 분위기에 뭐가 뭔지 판단이 안되어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신랑은 애원 비슷한 눈길을 보냈고, 그 눈빛이 애처로워 어물쩍 어물쩍 일어나야만 했다. 일어섰을 뿐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답을 찾아 헤매는 아이처럼 부엌으로 가서 엉거주춤 서있었다. 무언가 할 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나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앉아있는 건 용납하지 않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 공기 중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나에 대해 사사로운 것들을 물어보는 분들은 없었다. 이미 나에 대한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잘근잘근 씹어진 후 나름의 소화를 거친 것들을 입수한 터라, 나에 대한 판단이 끝난 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 형제가 어떻게 되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정도의 상투적인 신상은 나에게서 직접 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입으로 내뱉는 생생한 내 언어를 관찰하고, 나의 태도나 풍기는 분위기로 나를 파악하려는 아주 조금의 노력정도는 있어도 무방 할 텐데, 그 누구도 그런 작은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의 존재를 일가친척들에게 하나의 존재로서 인정받지도 환영받지도 못한 경험을 하였고, 그때의 경험은 이후에 시댁을 생각할 때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으로 내속에서 버티고 있다. 내 모든 일생을 가지고 처음 방문한 나를 시댁 친척들이 질문해 주고 수용해 줬다면, 그 후 시댁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환영받지 못했던 나의 '처음'이 두고두고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