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여사는 50대 후반이고 수영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3년이 조금 지났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까지 직장인이라면 한 번은 겪을 것 같은 크고 작은 힘든 일들이 있었다. 그 밖에도 그녀이기에 더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일들까지 더해져서 퇴사하지 않고 버텨 내기 위해 특별한 이해심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오여사는 3년 전 5월 어느 날, 공단 본부의 인사팀 담당자의 연락을 받았다. 주말 지나고 출근할 수 있겠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주저 없이 냉큼 수락했다. 월요일에 첫 출근을 했다. 발령지로 가기 전에 직원 수속과 등록을 위해 관리공단 본부로 갔다.
공단 본부가 있는 곳은 오여사가 방문 교사를 했던 지역이어서 그녀의 손바닥에 안에 있을 정도로 훤했다. 등록을 마치고 인사팀 직원 두 사람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그곳은 오여사가 가끔 가던 식당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오여사는 아줌마처럼 수다를 떠는 자리가 아니니 조심성을 잃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었다. 팀장은 공단에서 근무 한 지 20년쯤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오여사를 치하했다. "경쟁률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 때는 면접만 보고 쉽게 들어왔는데, 입사시험이 바늘구명 처럼 되었더라고요, 요새 같으면 저는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했다. 팀장과 함께 온 직원이 정말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고 나서 오여사에게 이전에 무슨 일을 했냐고 물었다. 오여사가 10년 정도 독서지도사로 일했다고 하자 그녀는 뜬금없이 자기 딸이 12살인데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필독서를 소개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두 직원과 오여사의 대화는 어느새 아줌마 수다가 되어 자녀교육과 주문한 돌솥밥에 들어간 식재료얘기까지 거리낌 없이 주고받았다. 오여사는 직원들의 소탈하고 친절한 태도에 한결 마음이 놓이면서도 인사과 직원이 신입 직원 앞에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팀장은 자기가 고충처리위원회의 장도 겸하고 있으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해도 좋다고 했다. 오여사는 '고충상담이라고? 고충처리위원회까지 가서 해결해야 할 고충은 대체 어떤 고충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공단 본부에서 오여사가 근무할 스포츠센터까지는 대중교통으로 40여분이 걸렸다. 전철을 타고 가며 오여사는 취업 준비생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문교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오여사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공공기관'이었다. 블라인드 채용이라 성별이나 연령제한이 덜하고 입사에 성공하면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공공기관에 들어가려면 컴퓨터 자격증이 필수였다. 컴퓨터에서 '한글'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그녀로서는 첫 관문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컴퓨터 자격증을 위한 필기시험은 기출문제 집으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기 시험이 문제였다. 실기 시험 중에서 오여사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것은 함수였다. 함수에서 5문제가 출제되는데 최소한 2개 이상은 맞춰야 합격할 수 있었다.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풀어도 새로운 유형으로 재빠르게 진화하는 함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무료 유튜브 강의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다.
컴퓨터에 최적화된 세대가 하는 최신 버전의 문제를 푸는 강의가 절실했다. 대세 강사라고 이름난 유료 온라인 강의를 찾았을 때 합격에 대한 예감으로 벅차올랐다. 함수에 탄력을 받게 되자 시험 치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함수에서 무려 3개를 맞은 날도 합격하지 못했다. 가장 자신 있었던 매크로와 차트에서 어이없는 실점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함수에서 안정적으로 2~3개를 맞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쪽저쪽에서 사달이 났다. 오여사는 5번 만에 드디어 합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 지원서를 냈다. 구청에서 뽑는 시간선택제 임기제(마급) 공무원 시험에도 응시했고 그 외에도 대략 20군데 정도에 입사 원서를 냈다. 서류전형의 문턱은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진짜 시험은 그다음부터였다. 컴퓨터 자격증 시험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NCS라 불리는 직무능력 평가 시험이었다. 다 어려웠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자원관리였다. 문제 자체가 해석이 되지 않았다.
시험공부 외에도 오여사의 마음을 은근히 괴롭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젊은 청년들의 일자리 하나를 그녀가 빼앗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었다.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청년들아, 미안하지만 나도 생계형이라 어쩔 수가 없단다. 용서해 주렴' 했다. 그러다가 시험에 떨어지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야, 일자리 하나가 청년들에게 돌아갔으니까 ' 라며 자조했다.
NCS를 봤던 곳은 필기에서 과락으로 일치감치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1년 이상 공을 들이며 준비하는 시험을 독학 한두 달로 갈무리를 했으니 당연했다.
필기시험에 상식 50문제를 치렀던 곳은 기대가 절로 되었다. 기출을 열심히 풀었던 보람이 있어 역사에서 딱 한 문제를 빼고 다 맞췄다. 그곳이 바로 스포츠센터를 관리하는 도시관리 공단이었다.
면접을 잘하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몇 번의 면접 경험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인 태도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 같았다. 맡은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똑 부러지게 하지만 조용하고 무난하고 겸손한 사람이란 걸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공공기관이라면 까다로운 민원인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빠뜨리지 않고 할 것인데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야 했다.
면접 경험이 쌓여도 시험을 보는 날은 항상 떨렸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지 했지만, 말 뿐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신경정신과에 가서 '필요시' 약을 처방받았다. 약효가 4시간 간다고 했다.
오전 10시에 면접이 시작되니까 9시까지 미리 면접장소로 오라는 문자가 왔다. 8시 50분에 도착하니 벌써 몇 명이 와 있었다. 젊고 날씬하고 예쁘고 당찬 모습에 오여사는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얼른 처방받은 약을 털어 넣었다. 9시에 약을 먹었으니 1시 전에만 순서가 돌아와도 문제없을 것이다.
설마 그때까지 기다리게 하겠나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3시가 돼서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계산대로 라면 약효는 이미 2시간 전에 떨어졌다. 시험장에 한꺼번에 5명씩 들어갔는데 오여사는 다행히 다섯 번째 순서여서 앞 번호 수험생들의 면접을 지켜보며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예상 문제로 연습한 것이 대부분 적중했다. 심하게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응대를 하겠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오여사는 "저도 가끔 은행이나 주민센터에서 민원을 제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민원인의 입장에서, 먼저 얼마나 속상하셨냐고 공감해 주는 말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면접관들의 표정에서 희미한 미소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대가 절로 되었다. 혹시나 하고 합격자 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예비번호를 받긴 했지만 예비자가 합격자가 되려면 합격자 중 누군가가 포기해야 한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오여사는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먼저 합격 통지를 받은 곳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특성화 고등학교 진로 지도 선생님이었다. 컴활 자격증 공부를 하기 전에 취득한 직업상담사 자격증으로 응시했던 시험에 통과해서 얻은 일자리였다. 진로부장선생님과 진로담당 선생님들이 있는 취업부 교무실로 출근했다. 특성화 고등학교는 학기 초부터 취업 의뢰가 들어왔다. 선생님들이 학생을 추천해 주면 오여사는 학생들과 함께 시험 준비를 했다. 추천 특성상 학생들은 자기소개서와 면접만 잘하면 무난하게 합격이 되었다.
구인 의뢰가 들어온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경영 이념과 인재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뒤, 학교에서 추천을 받은 학생과 함께 자소서와 면접 준비를 했다. 함께라고 했지만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자격증 한 두 개는 준비했지만 본격적인 취업 준비는 처음이라 자소서와 면접 준비의 대부분을 오여사가 해야 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바쁜 학생들이 3줄 안팎으로 짧게 써 온 자소서는 문항에서 요구하는 500자를 맞추기 위해 오여사의 손에서 자소설이 되었다.
자소설이라 하더라도 아닌 사실을 꾸며서 쓸 수는 없었다. 학생들 각자의 스토리를 알아야 했지만 문자나 톡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어떠한 질문에도 학생들이 단답형 대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에 학생들의 귀가 시간에 맞추어 통화를 했다. 학생들의 귀가시간은 대개 10시가 넘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나면 11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취업부에서 하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경험치가 쌓일 뿐만 아니라 취업 현장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고 안목도 생기므로 부가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다만 6시간 근무와 10개월 계약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된 낮은 급여와 짧은 계약기간은 생계형 직장인인 오여사에겐 근심거리였다. 퇴직금 발생 기한 1년에 미치지 못해 퇴직금도 받을 수 없을뿐더러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 곧 구직 시장에 내몰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렇긴 해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거기서 뼈를 묻을 사람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단 본부에서 받은 예비번호의 효력 상실을 한 달 앞둔 5월 어느 날, 오여사는 출근길에 본부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고 바로 출근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오여사는 전철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1년 전만 해도 그녀는 이 동네의 주민이었다. 지역에서 신도시에 준하는 개발로 인해 인구는 급증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편의시설로 스포츠센터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고 오가는 길에 실제로 건물 공사 과정을 지켜보았다. 스포츠 센터에서 근무할 인원을 뽑을 때, 응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공단 홈페이지의 구인 공고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지 1년 남짓이 흐른 연말에 구인공고가 올라왔고 미리 준비한 자격증을 가지고 응시할 수 있었다.
예비번호로 가까스로 취업을 했지만 취업에 성공했으니 오여사의 오랜 소망이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기쁘고 감사한 동시에 기대도 되고 흥분도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스포츠 센터의 사무실 출입문 앞에 섰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들뜬 기분을 누르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출입문의 손잡이를 앞으로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