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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빌런-8화

by 분홍소금

한편 오여사는 관장을 비롯한 강사들, 사수인 왕수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장르와 종류가 다른 스트레스였다.


사수인 왕수지의 도를 넘은 갑질과 무시가 지속되었지만 사소한 잡무라도 그녀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참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여사는 왕수지가 첫날에 가르쳐준 업무를 이튿날부터 현장에서 실수 없이 해야 했다.

고심을 거듭해야 하는 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소소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정해진 일만 따박따박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방문자들의 뜬금없는 질문과 유사 안전사고 발생등,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불쑥불쑥 터졌다. 오여사는 난생처음 맞닥뜨린 일에서 규정과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본부에서 그녀의 채용을 후회하지 않게 보란 듯이 잘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수지가 가르쳐 줄 때는 쉬워 보였는데 해 놓고 보면 여기저기 작은 오류가 발견되었다.

결제과정에서 디폴트 값을 제대로 주지 않아 환불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왕수지는 작은 실수에도 왕짜증을 냈다. 그녀는 회원의 자격에 맞게 수동으로 입력하지 않고 결제창에 주어져 있는 대로 결제를 하면 어떡하냐고 다그쳤다.


사실 오여사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먼저는 결제창에 있는 정보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좌명, 락커임대 여부, 할인 자격, 결제 기간, 강좌 시작일과 종료일 등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일일이 확인을 하자니 일 처리가 느렸다. 게다가 왕수지가 옆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으면 잘하던 것도 실수를 했다.

왕수지는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실수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수정하면 되는 일도 대형 참사라도 터진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그것도 모자라 오여사가 보는 앞에서 오류가 난 시트를 캡처해 따로 저장을 했다.


왕수지는 일부러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때를 노렸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왕수지는 두 달씩 결제하는 회원인데 한 달만 결제가 되었다며 왜 기간을 확인하지 않았냐고 몰아붙였다. 그 정도로는 분이 덜 풀렸는지 오여사의 잘못을 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락커 현황판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탈의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탈의실에서 전자키를 점검하고 나온 그녀는 오여사를 향해 사수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질책과 지시를 동시에 시연했다. 전자키가 없어진 걸 모르고 있는 게 말이 되냐, 전자키는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되는 것을 아직도 모르냐며, 전자키 관련 업무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은 후, 해당 전자키 이용자가 결제한 카드사에 중개요청을 해서라도 반드시 찾아 놓으라고 지시를 했다.


할 말을 다 하고 나면 "집에서 살림하다 오신 거 아니잖아요?"를 말끝마다 후렴처럼 갖다 붙였다. 후에 오여사는 습관처럼 내뱉던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에 한 번도 반박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 주일쯤 되자 오여사는 전체적인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업무 처리를 한층 수월하고 정확하게 해 나갔다. 결제창에서 잘 보이지 않던 정보도 한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찾아오는 주눅 든 마음을 쫓아내려고 부러 어깨를 폈다.


업무에 점점 자신감을 되찾아 가던 어느 날, 어떤 회원이 충전을 부탁하며 맡긴 스마트 폰을 왕수지가 발견했다. 왕수지는 기다리던 꼬투리를 잡은 사람처럼 잔소리 폭탄을 퍼부었다. 스마트 폰 충전이나 소지품 보관 따위는 데스크에서 일절 금지된 일인 것을 알면서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질렀다.

오여사는 참다못해 "너무 하는 게 아니에요, 그만한 일로 꼭 그래야 되겠어요? 스마트 폰 충전 좀 해주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에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왕수지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다음날 출근을 하자마자 기관장이 오여사를 불렀다. 기관장은 다짜고짜 "젊은 직원들한테 잘해야지 어디서 막말이세요?" 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일도 더럽게 못하는 주제에." 오여사가 짐작으로만 알던 말을 기관장이 입밖에 냈다.

작은 일에도 기관장과 왕수지는 '너 더럽게 일 못하는 것 맞잖아.' 하는 눈빛으로 오여사를 교묘하게 압박했었다. 오여사는 '말로만 듣던 가스라이팅을 사무실에서 당하는구나' 눈을 치켜떠 보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왕수지보다 오여사를 괴롭힌 것은 기능직 수영직원들이었다. 기능직 직원, 다시 말해 수영 강사들이야말로 오여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수영강사들은 데스크를 제외한 수영장과 탈의실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담당구역뿐 아니라 데스크 업무까지 간섭과 지적질을 일삼았다.


탈의실에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많냐고 하며 미화여사들을 관리하지 못한다고 타박을 했다. 탈의실 문이 왜 열려 있냐고, 그러다가 외부인이 들어가면 어떡하냐고, 수영장 안에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업무인지 아직도 모르냐? 방금 전에도 어떤 아이가 들어갔는데 자기가 안 봤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목소리를 있는 대로 깔면서 근엄을 떨었다. 마지막엔 이 일에 대해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그건 주임님 책임이라고 못 박았다.


오여사가 입사한 후 두 수영 강사와 왕수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친밀해졌다. 이들은 똘똘 뭉쳐 오여사를 괴롭히는 오피스 빌런 3인방으로 거듭났다. '로알드 달'의 동화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에 나오는 농장주 3인방처럼 겉모습은 달라도 못돼 먹은 것은 똑같았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기관장 탓이 컸다.

기관장은 리더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부터 사소한 행정업무까지 자기가 할 일을 이 세 사람에게 떠넘기며, 그들이 센터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아줌마 어때? 교육 잘 시키고 있지?" 기관장의 한마디에 그들은 오여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악의적으로 일러바쳤다. "어제는 탈의실 문을 안 닫았어요, 수영장에 아이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디폴트 값을 제대로 주지 않아 결과가 엉망이에요. 전자키가 없어진 줄도 모르더라고요..."


일이 있는 곳에서 힘이 나온다고 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실세가 되어 "일이 서투를 때 마음대로 구박해자, 저항할 의지를 끊어야 해, 싹을 잘라, 싹을 잘라." 다짐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기관장은 기관장대로 공단 본부가 사람을 잘못 뽑아도 한참 잘 못 뽑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게다가 기관장이 이들과 한 편이 되어 오여사가 제풀에 꺾여 얼른 나갔으면 좋겠다고 수군거린다는 소문이 오여사 귀에까지 들렸다.


오여사는 관장과 빌런 3인방의 온갖 트집, 무시와 고자질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맡은 일이 손에 익어 잘 해내고 있었지만 갑질과 왕따와 무시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여사는 그들의 부당한 행동에도 한 명을 상대하면 나머지 세 명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 두려워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했다. 가스라이팅과 갑질로 인해 주눅 든 마음과 저자세가 일을 잘하게 되어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 설명한 학습된 무기력과 같아 보였다.


오여사는 당당하려고 애썼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늘 긴장했다. 관장과 그의 무리들을 보기만 해도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자주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고 얼굴 표정도 어둡기만 했다. 못한다 못한다 하니까 잘하는 일에서도 실수를 했다. 사무실 출근을 앞두고 설렜던 마음은 남의 이야기가 된 지 오래였다. 출근이 확정된 날 이렇게 저렇게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들은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애초에 그녀가 일을 잘 못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했던 것도 문제를 키웠다. 처음엔 누구라도 서툴기 마련인데 빠르게 장착된 그녀의 과한 자기 비하와 자격지심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나,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홧김에 나가면 갈 데가 없다는 현실자각이 한몫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환경에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울한 마음을 떨치고 에너지 넘치는 직장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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