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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을 품은 나무

by 분홍소금

겨울산에서 보는 나무는 어떤 느낌일까요? 잎이 떨어진 기둥과 나뭇가지만 남아 있어 좀 쓸쓸한 모습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저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겨울나무는 농한기의 농부처럼 한가하고 여유롭습니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엔 이파리의 엽록소가 쉴 새 없이 흡수한 빛의 에너지로 포도당과 같은 유기물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계속 자라야 했고, 생태계의 다른 생명체에게도 에너지를 공급해야 했지요. 가을에 이파리를 떨구는 것까지 힘든 일을 마친 나무는 겨울이 와서야 마침내 노동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햇빛과 바람은 큰 나무에 가려져 있던 작은 나무와 만나는 즐거움에 신났습니다. 햇빛은 작은 나무들을 어루만지고 바람은 장난스럽게 입김을 불어대지요. 겨울에 명랑한 한 때를 보내는 자연의 밝고 맑은 기운이 길 위에 꼬물이 같은 저에게도 전염되어 덩달아 명랑한 한 때를 보내게 되지요.



나무들이 나누는 스몰토크를 상상하는 것은 겨울 등산의 소소하고 확실한 즐거움입니다.

작은 나무들은 우람한 나무 기둥에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아저씨는 꼭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같아요." "아줌마의 팔은 말 안장보다 더 편안해 보여요." "얘들아, 어젯밤 바람에 너희가 춤추는 걸 봤단다. 멋들어진 몸짓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구나."



하지만 겨울 햇살이 구름 뒤에서 낮잠을 자고 바람이 진눈깨비를 불러와 심술을 부리면 서로 이웃한 크고 작은 나무들의 대화는 사뭇 진지해 집니다. 힘들고 고된 시간이 왔음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매서운 환경을 함께 헤쳐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나무들은 먼저 봄이 올 때까지 꿈과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겨울 나무의 꿈은 초록의 생명입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누가복음 1:57)

무슨 일에서건 기한이 있습니다.

겨울이 끝나야 새싹을 틔울 수 있듯이 임신한 여인도 기한이 차야 해산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편에서는 엄마 뱃속에서 40주를 잘 머물러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수 있습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나날이 커는 아이로 배가 불러와 자궁이 장기를 누르고 몸이 무거워 편하게 누울수도 없지만 기한까지 잘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가 무슨 뜻일 까요? 사전적인 의미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입니다. 하지만 인내를 해야 한다고 해서 때가 될 때까지 무조건 참고 견디거나 두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에도 나무가 초록 꿈을 품고 있듯이 사람들도 때가 될 때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잘 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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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시간을 잘 보낸다면 내면이 깊고 넓어지는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무들은 잎이 무성했을 때 알지 못했던 자기들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방해 받지 않고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통해서 입니다.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춥고 힘든 겨울이라서 가능한 일이지요. 앙상한 가지에 햇빛이 비추면

그제야 오롯이 드러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와 거친 환경을 감내해야 했던 모진 세월을 돌아 봅니다. 한편으로는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님에 고개가 절로 숙여져 집 나갔던 겸손을 다시 데리고 옵니다.



증발을 막아주고 흙이 어는 것을 막아 주는 낙엽에도 감사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주위를 둘러봅니다. 바람에 부러지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작은 나무에게 "힘들지? 나도 안다, 나도 그랬단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남았잖아."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며 다독입니다. 오손도손 오고가는 솔직하고 훈훈한 나눔을 지나가던 다람쥐와 새들도 듣습니다. 듣고 힘을 냅니다. 춥고 배고픈 겨울을 견디는 것이 버거운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서로의 힘듦을 공감하고 나누는 동안 길어진 해에 두터워진 햇빛은 포근하게 나무들을 감쌉니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나무와 새와 다람쥐 뿐아니라 사람들이야 말로 때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들이 널렸습니다. 수험생은 시험 날까지 기다려야 하고, 결혼식 날을 잡은 예비 신랑신부도 잘 기다려야 합니다. 속 썩이는 아이들도 철이 들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하고 직장에서 선임은 신입사원이 일이 몸에 익을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매일을 기다리는 것에 지쳐 황금 달걀을 한꺼번에 얻으려고 암탉의 배를 가른다면 얻을 것이 없습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인내의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고 다듬어 나간다면 기한이 찼을 때 다함께 큰 기쁨으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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