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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어르신들-15화

by 분홍소금

수영은 흔히 죽기 직전까지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들어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운 등이 수영인 것은 확실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저명한 교수님도 105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일 30분씩 수영을 한다고 들었다.


오여사가 근무하는 수영장도 온통 어르신 천국이었다. 어딜 가나 노령인구가 눈에 많이 들어오는 초고령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역 특성의 영향도 한 몫했다.

주변의 대단지 아파트의 입주민들 중에 유독 노령인구가 많은 데다가 수영장 근거리에 시니어스 타워라 불리는 실버타운까지 더해져서 수영장뿐 아니라 여타 강좌에서도 어르신들의 참여가 활발했다.


수영을 하려는 어르신들의 열정은 남다르다. 대학의 인기 과목 수강신청보다 더 어렵다는 회원 등록에서 어르신들의 활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회원등록은 신규등록일에 온오프라인에서 9시에 시작하는데 몇 개 되지 않는 빈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첫 번째도 어르신, 두 번째도 어르신이다. 특히 오프라인의 경쟁에서는 자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9시에 등록이 시작되지만 어르신들은 스포츠 센터가 문을 여는 오전 6시 이전에 출입문 앞에 줄을 선다.


온라인의 문턱도 가뿐하게 뭉개버린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쟁력 있는 인력을 동원한다. 아들과 며느리 실력으로는 어림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손주가 나서야 할 시간이라고 가족들에게 일찌감치 선언을 한다.


손주찬스에도 불구하고 신규등록을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르신들의 실력은 실패한 다음에 빛을 발한다. 그들의 진짜 경쟁력은 포기를 모르는 데 있다. 그들은 등록할 때까지 신규등록일자를 주시한다. 첫 달에 안되면 다음 달, 다음 달에 안되면 그다음 달,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들은 기어이 월 회원으로 등극하고야 마는 것이다.


신규등록을 성공하건 실패하건 어르신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들의 노력과 열심을 알고 있는 오여사는 그들이 하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


"신규등록 성공했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에 와서 줄 섰어"

-아구, 정말 잘 됐어요 잠도 못 주무시고,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손자가 했어. 미리 용돈 주고 부탁했잖아, 내가 준 용돈이 회비보다 훨씬 많아, 그래도 그게 제일 빠르잖아"

-선생님, 윈윈하셨네요, 손자는 커피값 벌어서 좋고, 선생님은 회원 등록해서 좋고.


"나 석 달만에 된 거야 잘했지"

-너무 잘 된 거죠 수고 많으셨어요.


" 새벽부터 와서 줄 섰는데 내 앞에서 마감됐어"

-아구 어떡해요? 그런데 이번 달에 빈자리가 유난히 적었어요.


수영장 강좌 중에서 어르신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쿠아로빅이다. 매월 아쿠아로빅을 시작하는 날에도 소감 한 마디씩을 잊지 않는다.


"운동량이 생각보다 많았어, 힘들어 죽겠어."

-힘들다는 건 열심히 운동을 하셨다는 증거예요.


"선생님이 하는 대로 도저히 못 쫓아가겠어. 어쩜 좋아?

-선생님이 하는 대로 다 따라 하실 필요 없으세요, 선생님이 알아서 조절하세요, 체력도 안되는데 무리하시다가 지쳐서 주저앉으면 큰일 나요


"너무 재미있다"

-맞아요, 다른 분들도 재미있다고 그러세요.


"몸이 안 따라주네, 선생님 눈치가 보여서 열심히 하고 싶은데 선생님한테 미안해."

-원래 그래요, 선생님 눈치 안 보셔도 돼요. 할 수 있는 만큼 계속하다 보면 점점 좋아지니까 걱정 마세요


어떤 분은 어렸을 적에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생겨 물이 무서워서 엄두도 못 내다가 73년 만에 물에 처음 들어갔는데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놀라웠다. 오여사는 축하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여사에게 그 사실을 나눠준 것도 잘한 일이었다. 물이 안 무서워졌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누구한테라도 그 사실을 나누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오여사는 어르신들의 피드백에 가볍게 응대했지만 그조차 즉흥적으로 하지 않았다.

선생님 눈치 보지 말고 운동량을 조절하라는 말도 사실은 아쿠아로빅 선생님의 자문을 구한 후에 나온 대답이었다.

아쿠아선생님이 출근을 하면 회원들의 피드백을 전하면서 선생님이 하는 말을 새겨 들었다가 응대를 했다. 그 시간에 어르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며 선생님께 이런저런 요청도 했다.

"어르신들이 선생님 따라 하는 것이 너무 힘들대요, 그럴 때는 따라 하느라 무리하는 것보다 알아서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운동도 중요하지만 어르신들의 안전이 더 우선이라서요."


강습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격려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격려를 하려면 수영 강습이 어떤 속도와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강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봐야 했다.


"어르신들이 강습을 막상 시작하니 너무 힘들다고 해요, 강습 시간에 어르신들 어떠세요?

"어우, 어르신들이 진짜 말 안 들어요, 아무리 고치라고 해도 절대로 고치지 않아요."


"그런가요? 배우러 온 사람들인데 말을 안 듣는다고 하니까 이외인데요, 선생님, 그런데 저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너무 이해가 가요, 저도 수영을 배우면 그럴 것 같거든요, 그분들이 절대로 안 고치는 게 아니라 못 고치는 것 아닐까요? 몸이 안 따라주는 거죠, 마음은 수영 황제 펠프스인데 몸은 노목이라, 하하"


어느 날 강사님은 누구누구는 진도를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니까 그 회원에게 시간을 많이 쓰게 되어 다른 회원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했다. 매번 그 회원만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우회적으로 환불을 권했으니 환불 진행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강사님에게 환불을 권유받은 그분은 데스크에 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참을 수가 없다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듯 화풀이를 했다.

뿐만 아니라 강사님이 회원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비웃었다고 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환불까지 하라고 하냐며 화가 풀릴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분은 다음날 강사의 사과와 퇴출을 요구하는 민원을 넣었다.

강사는 재계약을 하지 못했고 다른 강사로 교체되었다. 이후로는 어르신들의 속도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점차 자리 잡았다. 어르신들은 퇴출 위험 없이 편하게 강습을 받을 수 있다고 좋아하셨다.


어르신들 중에 할머니들이 특히 열심히 한다. 이들은 여간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법이 없다. 대개 한두 달이면 발차기를 끝내고 자유수영을 시작하지면 할머니들은 6개월이 지나도 자유수영을 시작하지 못한다. "어떠셨어요?" 하면 "물에 겨우 뜨는 수준이야" 했다.


옆 레인에서 자유수영을 하건 말건 왕초보 레인에서 킥판을 붙들고 연습을 하며 끝까지 버틴다.

말로는 자기는 왕초보라 선생님과 회원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미안함보다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더 앞서기에 버티고 또 버틴다.


아무리 고령이라도 붙어 가다 보면 1년 정도 지나면 자유수영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 일생에서 그런 성취가 없었던 것처럼 드디어 자유수영을 하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혼자 와서 외로운 싸움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친구와 함께 다니는 분들은 1년 코스를 무난하게 완주한다. 중간에 환불하지 않고 잘 버텨낸 덕분에 자유수영과 배영은 확실하게 배운다.


오여사는 수영장 이용자들을 적극적으로 응대하면서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점점 늘었다. 오여사의 업무 방식은 방수지의 "네, 아니요" 하는 응대와 점점 차별화되었다. 그럴수록 방수지와 2명은 노골적으로 오여사를 싫어하는 티를 냈다. 책상 위에 비치된 사무용품을 쓰고 나면 제자리에 놓지 않고 근처에다 집어던졌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와서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탈의실을 왔다 갔다 하며 툴툴거렸다. 그러다가 탈의실 키 현황표를 보고는" 49번 키가 안 꽂혀 있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49번 키는 며칠 전에 고장 났다고 공유했는데, 밑에 날짜와 시간 있네요" 대답은 했지만 뭐라도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을 알고 있는 오여사로서는 언짢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할 수는 없었다.


사무실의 험악한 분위기에도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점점 늘었다.

이것은 수다인가, 아니면 업무의 연장인가 하고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즈음에 오여사는 툭하면 '이게 내 업무 스타일이다 어쩔래?'를 우기듯 되뇌고 있었다. 더구나 '업무에서 비롯된 대화를 억지로 중단할 필요가 있을까?' 했다.


어느 날 한 회원이 오여사를 불렀다. 락커가 열리지 않으니 좀 봐 달라고 했다.

"락커가 안 열리는 이유는 번호가 돌아가서 그래요, 제가 다시 비번 맞춰 드릴게요 비번이 뭐예요?"

"0909(영구영구)에요"

"영구 없다 할 때 그 영구일까요?"

"아뇨, 우리 남편 이름이 영구예요"

"푸웃, 남편이름을 비번으로 쓰는 사람 처음 봤어요"

"제가 우리 남편이 너무 좋아서 남편 이름을 비번으로 쓰는 줄 알았죠?"

"아니요, 세상에 남편이 너무 좋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게요, 살 사람만 있으면 어디다 팔아버리고 싶어요."

오여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나가다 대화를 들은 아쿠아로빅 선생님도 빵 터졌다.

그렇게 셋이서 한참 동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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