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바빴다. 주말에 고향에서 실어 온 것들을 싱싱할 때 만들어 먹고 싶은 마음에 할 일이 많았다.
먼저 두유제조기에 전날 저녁에 다듬어 놓은 호박죽을 안쳤다. 냄비에 멸치가루를 푼 물을 끓였다. 물이 팔팔 끓을 때 나박나박 썰어 놓은 호박을 넣어 호박 들깨탕도 끓였다.
파래와 김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파래를 씻기 위해 양재기에 넣고 물을 받았다. 아뿔싸 어쩌나, 씻기 전에 덜어서 냉동실에 넣는 것을 깜박했다. 다행히 김은 씻기 전에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을 수 있었다.
파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파래를 반쯤 덜고 굴을 알맞게 넣어 굴 파래 전 반죽을 했다. 밀가루와 튀김가루를 반씩 넣은 후 달걀 두 개를 깨뜨려 넣고 씻어둔 파래와 섞었다. 전을 부치면서 파래 김 무침도 만들었다.
해마다 11월 둘째 주에는 고향으로 감을 따러 간다. 올해도 우리 5남매와 형부와 올케, 이모가 고향에서 만났다. 모두 8명이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감나무가 있는 밭으로 갔다.
오빠와 남동생이 올해는 예년보다 감이 덜 열렸다고 해서 '잘 됐다' 하고 가보니
실제로는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감나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감이 달려 있었다.
나는 나무에 감이 많이 열리는 것도 반갑지 않다고 했다. 감이 너무 많이 열리면 따는 것만 해도 하루 종일 걸려서 힘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집집마다 몇 박스씩 돌아가는 감을 알뜰하게 먹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감이 한 번에 몇 개씩 나눠서 익어 준다면 익는 대로 먹으면 되지만 문제는 감이 박스째로 한꺼번에 익어버린다는 데 있다.
한꺼번에 홍시가 된 감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재작년에는 건조기를 샀다. 두 박스를 깎고 썰어서 건조기에 말리고 말린 것은 꺼내 거실에 펴서 바람을 쏘였다. 깎는 것 만도 힘든데 건조와 바람을 쏘이는 것까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었다가 교회 소그룹모임에 열심히 날랐다. 잘 먹었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감의 종자가 좋은 데다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청정지역 산에 있어서 그런지 감이 유난히 찰지고 달았다.
감을 따면서 계속 먹었다. 큰언니가 나보고 감을 축낸다고 하면서 너는 일당도 없고 점심도 없고 새참도 없다고 농담을 했다.
감밭에서 옛날이야기 꽃이 피었다. 작은 언니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 마루 천장 아래에 기둥에 달려있었던 스피커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스피커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엄마한테 됫박만 한 스피커에 사람이 못 들어갈 건데 소리가 어떻게 나오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주디(방언, 표준말은 주둥이 혹은 입)만 들어갔다 아이가"라고 대답했다고. 다들 빵 터졌다.
감을 따 놓고 보니 올해도 예외 없이 감이 너무 많았다. 서른 박스가 넘었다.
한 집에 세 박스씩 나누고도 몇 박스가 남았다.
나는 한 박스도 많고 한 바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노래를 불렀다. 원하는 사람 많이 가져가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몫은 무조건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고 다른 집에다 떠안길 수도 없어서
나는 감 박스를 보면서 누구에게 나눌 것인지 계속 생각했다.
언니는 자기는 두 박스를 갖고 가고 한 박스는 큰언니에게 주었다고 했다.
내가 먼저 그렇게 할걸, 한 발 늦었다.
감을 다 따고 나서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고 회를 사러 삼천포에 갔다. 고향 집에서 1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동생과 올케언니가 횟감을 고르는 동안 시장구경을 했다.
산지에서 싱싱하고 맛있고 게다가 양도 푸짐한 해물들을 보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도 다 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몇 가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굴과 생새우와 파래를 사겠다고 하니까 언니와 이모가 말렸다. 그걸 어떻게 서울까지 갖고 가냐고 했다. 스티로폼 박스에 아이스팩 넣어서 가면 된다고 하면서 2~3일씩 걸리는 택배도 주문하는데 이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언니들과 이모가 사는 장어와 조기, 멸치와 다시마도 샀다.
동생은 방어를 고르고 있었다. 방어가 12월이 제철이 아니냐고 물으니 지금도 충분히 맛있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5시쯤 되었다.
회와 원수 진 사람들처럼 정말 많이 먹었다. 그러고도 저녁을 또 먹었다. 시골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지 저녁을 먹었는데도 초저녁이었다.
오빠가 어렸을 적 이야기를 했고 나는 오빠의 초등학교 남자 동창생의 이름을 알아맞혔다. 1명 빼고 다 알아맞혔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지만 다들 피곤하다고 하면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벌써 자면 어떻게 하냐고, 이렇게 일찍 자면 새벽에 깨서 잠을 더 못 자게 된다고 하니까 그건 맞다고 하면서도 다들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8시도 안 됐는데 코를 골면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평소에 12시 정도에 자는데 8시에 불을 끄고 누우니 당연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해가 될까 봐 티브이를 보거나 유튜브를 볼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샅밖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강이 있고 강을 끼고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 데다가 자연 생태공원과 생태공원 안에 황톳길과 숲, 대나무 등 엄청난 풍광이 있는데도 한 군데도 가보지 못했다. 시골에서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감 한 번 따주고 먹을 것(회) 사러 가고 또 먹고 자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주일에는 교회를 가야 해서 웬만해선 고향에 올 수가 없었다. 이번 가을에는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가을 소풍이라 생각하고 큰맘 먹고 왔는데 나의 2박 3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아쉬운 마음에 만발했던 생각도 사그라져 11시 반쯤에 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5시도 안 돼서 노인들이 일어나 부스럭거렸다. 나 보고는 신경 쓰지 말고 푹 자라고 했지만 그나마 젊은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피곤했지만 일어나서 물을 끓여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아침식사 준비를 거들었다. 매운탕과 생선구이와 시금치나물을 해서 이모가 담가온 김장 김치와 먹었다.
짐은 미리 챙겨서 다 실은 상태였는데 오빠가 "호박을 안 실었네" 하면서 한 집에 두 덩이를 실으라고 했다. 언니가 자기는 한 덩이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한 덩이를 내게 주었다. 나는 정말 싫다고 했는데도 언니는 "너 호박 좋아하잖아" 하면서 가을지나 겨울까지 먹으라고 했다.
커피를 마신 후 남동생과 언니와 내가 한 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 나는 생태공원에서 산책도 한 번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더니 언니는 그게 뭐 아쉽냐고 하면서 자기는 그런 것은 아쉽지 않다고 해서 좀 놀랬다.
자기는 맛있는 것 많이 먹어서 너무 좋았고 감을 따는 것도 재미있고 삼천포 가서 회 사 오고 시장구경하고 싸고 싱싱한 해물을 쟁여서 가는 것이 너무 좋다고 했다.
우리는 오면서 방앗간에 들러 미리 주문한 참기름, 들기름, 들깻가루, 깨소금을 받았다. 읍내에서 아침 일찍 문을 연 하나로 마트에 가서 흑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샀다. 마지막까지 먹을거리를 야무지게 챙기며 우리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짐을 내리고 교회에 갔다 오자마자 굴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워서 남편과 저녁을 먹었다.
아침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식재료로 정성껏 한 상을 차렸다. 호박과 파래의 향연이었다. 고향에서의 가을소풍이 식탁 위에서 고향의 맛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입안 가득 퍼지는 가을 햇살이 담겨있는 추억의 맛을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