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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토끼 Feb 07. 2016

보상심리

그 행동은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였다

그래. 인간관계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 라고 바라게 되네. 물론 그건 과제의 분리와는 동떨어진 발상이지. 우리는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되네.

「미움받을 용기」


보상심리라는 말이 원래 있는 용어는 아닌가 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보상심리'에 대한 의미들이 조금씩 다르게 쓰이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한 나에게 초콜릿 한조각을 먹는 것'도 보상심리고, '내가 일병일 때 이만큼 힘들었으니 너희들도 당해봐야 한다'는 것도 보상심리라고 불렸다.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에게 하지 못해?'라는 것도 보상심리에서 기반한 말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경우를 '보상심리'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사람들은 기술하고 있었다. 나는 이 중에서도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에게 하지 못해?" 라고 말하는 보상심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림 출처 http://hisastro.com/1267



싸움의 잘잘못을 가릴 '제 3자'의 입장으로 판단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A와 B의 갈등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명백히 잘못의 책임을 가릴 수 있었다. 내가 보상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그 뒤에 이어진 말이었다.


"그 때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하며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아?"


화가 난 A는 현재의 갈등과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을 꺼내면서 잘못한 B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자신이 해준 만큼 주지 않는 B에게 서운함이 더 커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B는 A의 희생을 원한 적이 없다. 그 때의 A는 아마 B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희생했다. '무엇을 바라서'한 행동이 아니었을거다. A의 보상심리는 유치한 '생색내기'의 모양이 되었고 B는 잘못한 것에 비해 훨씬 더 파렴치한 입장이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유형의 보상심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우연히(누군가의 고의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게 자신의 위치 역할을 따져 행동한다. 그 행동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지 않고 남에게 둘 때 보상심리는 작동한다. 마음은 한없이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할 때 주어야 통할 수 있다. 텔레파시가 작동하지 않는 이상,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24시간 대기조로 있는다고 해도 상대는 알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서운함이 발생하게 되지만, 사실 상대는 모르는게 당연하다.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데 주다 보면 맘 속에 보상심리만 생기게 되고 상대를 향한 미움은 커져만 간다.


보상심리는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촉진시키고 상대와의 마음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물론 나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미워하진 말아야 한다. 받기만 하는 관계가 있고, 더 많이 주는 관계도 있고 똑같이 주고 받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그 관계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것임을 잊지 말아야 겠다.


스타벅스 강남삼성타운점에서 오늘 잔상에 대한 나의 생각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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