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행동은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였다
그래. 인간관계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 라고 바라게 되네. 물론 그건 과제의 분리와는 동떨어진 발상이지. 우리는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되네.
「미움받을 용기」
보상심리라는 말이 원래 있는 용어는 아닌가 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보상심리'에 대한 의미들이 조금씩 다르게 쓰이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한 나에게 초콜릿 한조각을 먹는 것'도 보상심리고, '내가 일병일 때 이만큼 힘들었으니 너희들도 당해봐야 한다'는 것도 보상심리라고 불렸다.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에게 하지 못해?'라는 것도 보상심리에서 기반한 말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경우를 '보상심리'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사람들은 기술하고 있었다. 나는 이 중에서도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에게 하지 못해?" 라고 말하는 보상심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싸움의 잘잘못을 가릴 '제 3자'의 입장으로 판단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A와 B의 갈등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명백히 잘못의 책임을 가릴 수 있었다. 내가 보상심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그 뒤에 이어진 말이었다.
"그 때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하며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아?"
화가 난 A는 현재의 갈등과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을 꺼내면서 잘못한 B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자신이 해준 만큼 주지 않는 B에게 서운함이 더 커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B는 A의 희생을 원한 적이 없다. 그 때의 A는 아마 B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희생했다. '무엇을 바라서'한 행동이 아니었을거다. A의 보상심리는 유치한 '생색내기'의 모양이 되었고 B는 잘못한 것에 비해 훨씬 더 파렴치한 입장이 되었다.
나 역시 이런 유형의 보상심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우연히(누군가의 고의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게 자신의 위치 역할을 따져 행동한다. 그 행동의 주체를 자신에게 두지 않고 남에게 둘 때 보상심리는 작동한다. 마음은 한없이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할 때 주어야 통할 수 있다. 텔레파시가 작동하지 않는 이상,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24시간 대기조로 있는다고 해도 상대는 알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서운함이 발생하게 되지만, 사실 상대는 모르는게 당연하다.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데 주다 보면 맘 속에 보상심리만 생기게 되고 상대를 향한 미움은 커져만 간다.
보상심리는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촉진시키고 상대와의 마음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물론 나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미워하진 말아야 한다. 받기만 하는 관계가 있고, 더 많이 주는 관계도 있고 똑같이 주고 받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그 관계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것임을 잊지 말아야 겠다.
스타벅스 강남삼성타운점에서 오늘 잔상에 대한 나의 생각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