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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엄마와 함께 심은 꽃

엄마의 자서전 1

by 해피가드너


『행복한 가드너씨』
뉴욕에서 은퇴 후 새롭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재수정한 글도 포함됐습니다.



참 무모하기도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나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초짜 작가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나만의 글 정원에 '특별한 꽃 한 송이'를 심기로 한 것이다. 몰라서 용감했고, 지루한 고생 끝에 결국 해피앤딩으로 피어난 꽃. 엄마의 자서전이다.



#18

2년 전, 88세 엄마 생신에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그 연세가 되시니 좋은 옷과 가방도 필요 없다고 하시고, 여행도 수월하지가 않았다. 여러 선물을 생각하다 엄마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단 말을 가끔 하신 게 생각났다.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 엄마의 삶 자체를 담은 한 권. 자서전을 쓰시도록 도와드리자!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엄마, 자서전을 써보시는 건 어떠세요?" 엄마는 솔깃해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손사래를 치셨다. “나처럼 나이 많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글을 갑자기 쓰겠니?" 라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엄마를 설득하며, 나에게 이야기하듯 하나씩 글로 풀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젊은 시절, 문학도를 꿈꾸셨던 엄마는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셨다. "네가 도와준다면 해볼게."라는 조건을 달긴 했어도 일단 승낙하셨다. 엄마가 책을 쓴 경험도 없고, 글을 써본 지도 오래전이어서 가족들이 협력하기로 했다. 나는 대필을 맡았고, 딸은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준 내용을 정리했다. 한국의 동생은 가족 편집회의를 할 때마다 줌을 연결하기로 했다. 삼대가 함께 하는 특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자서전은 20주제로 나누어 매주 한편씩 쓰기로 했다. 엄마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시간의 흐름대로 정리해 소제목을 적었다. 제일 먼저 엄마와 딸 그리고 나는 자서전만을 위한 단톡방을 만들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결혼, 육아, 그리고 혼자 남은 현재의 이야기까지. 생각나는 대로 카톡으로 적어 보내셨다. 딸은 그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나는 그 조각조각의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 하나의 글로 완성했다.


놀라웠다. 80년도 더 된 기억의 조각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꺼내 놓으시다니. 엄마가 보내주시는 카톡에는 그때의 설렘과 기쁨,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엄마도 "신기하다. 기억의 저편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님께서 깨우치게 해 주시는 것 같다"며 기뻐하셨다. 어떤 날은 좀 더 젊어서 글로 정리해 둘걸 하면서 세월을 아쉬워하기도 하셨다. 우린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프로젝트를 하나씩 완성해 갔다.



카톡으로 보내주신 내용들



물론 순탄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의 주말은 당연히 반납했고. 카톡의 조각들이 완성되지 않을 때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애써야 하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떤 날은 무한반복하는 엄마의 말을 줄여 쓴다고 끝없는 불평을 들어야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엄마가 이별의 상실감 같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하실 때면, 나에게까지 그 감정이 전달됐다. 도저히 글로 못 옮길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여행을 가도 글을 써야 하니 컴퓨터는 꼭 가지고 가야 하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글을 쓰며 몸과 마음도 한없이 지쳐갔다. 뭐든 몰두하면, 과잉 집중이 문제다. 여하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정성을 다했다.


엄마가 자서전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축복된 삶을 살았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라고. 이 말씀이 오래도록 남았다. 과거가 감사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자는 사는 엄마의 인생관이 느껴져서다.


돌아보니 은혜와 사랑인 것을』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엄마의 삶이 담긴 23여 편의 글을 예쁜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엄마가 정하셨다. 처음부터 판매할 생각은 없어서 북크크를 통해 소량으로 제작했다. 우리는 엄마의 88세 생신에 가족들과 가까운 친지분들께 자축의 의미로 나눠드렸다. 엄마는 책을 받고, 꿈만 같다고 며칠을 우셨다고 했다. 읽고 또 읽으면서.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엄마가 인생을 정리하는 글을 남기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서전은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많은 의미를 주었다.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린 것 같아 홀가분했다.


결국 엄마의 삶을 대신 적었지만, 그 글은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며,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송이 특별한 꽃은 엄마의 이야기로 피어나 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삼대가 함께 쓴 엄마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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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