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드너씨』 마지막 연재 글입니다.
그동안 나는 글을 쓰며 잊고 지낸 그리운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빛바랜 사진 속의 얼굴처럼, 혹은 아련한 노랫말처럼 기억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좋았던 관계, 아쉬웠던 만남, 아팠던 이별의 시린 흔적까지 모두. 마음속에 오래 묵혀둔 말들을 나누고 나니 깨끗한 물로 닦아낸 듯 어느 정도 개운해졌다.
그리고 그들 틈에 조용히 숨어 있던 또 한 사람. 누구보다 나를 가까이서 지켜본 동반자이자, 오랫동안 잊고 지낸 사람. 이제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려 한다. 어쩌면 글을 쓰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를 서른 살의 나에게.
22화 사랑하는 서른 살의 나에게.
요즘 나는 바쁘지만, 더없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아침 햇살이 창가를 넘어올 때쯤이면, 나는 책상에 앉아 3시간 이상 꼼짝하지 않고 글을 쓴단다. 머리를 쥐어짜기도 하고, 문장이 꼬여 한숨도 푹푹 쉬면서 말이야. 키보드 자판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온전한 내가 되어 삶을 바라보고 있어. 서른 살 때엔 글을 쓰며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리라고는 꿈도 못 꿨는데 말이야.
오전 8시. 지금 너는 한창 바쁜 시간일 거야. 밥솥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 토스터기에서는 빵이 튀어 오르고, 남편의 출근 준비가 뒤섞인 작은 소음 속에 있겠지. 여섯 살과 세 살 두 아이를 유치원과 유아원에 보낼 준비를 하며 숨 가쁘게 움직일 거야. 큰아이는 말을 잘 들었지만, 둘째는 부산해서 너를 더 힘들게 했잖아. 노란색 티셔츠에 초록 반바지, 원복을 입히며 수도 없이 타일렀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재미있게 놀다 와라." 온갖 바람을 담아. 간절하게.
오전 9시.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너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지. 집에서 사당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안양에 있는 대학으로 출근해야 했으니까. 그 길을 너는 은근히 좋아했잖아. 버스 차창 밖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때에도 너는 감수성이 남달랐어. 마음에 뭔가 늘 아픈 기억을 가득 둔 사람처럼. 맑은 날에도 이유 없이 슬펐고, 웃어도 마음 한구석은 늘 시려왔지. 그때의 너를 만나면, 안아줄 거야. 이유 없이 울어도 괜찮다고. 그저 마음속에 쌓인 그리움과 외로움이 잠시 흘러나온 것뿐이라고.
오후 3시. 점심도 거른 채 학생들을 가르치다 아이들의 하원 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급해졌지. 가끔 학생들이 사다 주는 빵 한 조각으로 버틸 때도 많았어. 점심 먹는 시간도 아낀다면서. 집에 오는 길에 분식점에서 나는 냄새가 유혹했어도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이라 그냥 돌아서곤 했어. 네 하루는 늘 부족하고 빠듯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했지.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근하지 않았으니까.
오후 5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면 진짜 전쟁이 시작됐지. 저녁 준비를 하고, 집 안을 정리하고, 울다 웃다 뛰어다니는 녀석들을 달래며 정신이 쏙 빠졌어. 남편이 오면 잠시 바통터치를 하지만, 그도 잠시. 천상 부지런한 너는 집안 곳곳과 두 아이를 살피느라 밤늦도록 노심초사했지.
드디어 밤 10시. 아이들을 재우고, 불이 꺼진 집안.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멍하니 앉아 있던 너를 기억해. 하루의 쉼이 아니라 공허함만이 느껴졌던 그 시간 말이야. 그 순간에도 너는 네 마음을 들여다보려고는 안 했어. 그때 글이라도 썼다면 많은 위안이 되었을 텐데. 그때엔 외로움이 몰려올까 두려웠어? 아니면 그조차도 숨기고 싶었어?
서른 살의 너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고만 생각했어.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는지는 살피지도 못한 채. 게으르면 죄를 짓는 것 같다고 늘 자신을 들볶았어. 그래야 착한 딸로, 좋은 며느리로, 그리고 아내, 엄마로. 다양한 너의 역할을 잘할 수 있다고 느꼈잖아. 마음속에 풀려지지 않은 여린 감정들은 그냥 둔 채로 말야. 오직 앞만 보고 달렸지. 뒤돌아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러지 않아도 달라질 게 없었던 것을.
한편으론 그 치열했던 하루하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어. 네가 견뎌낸 그 시간 덕분에 늦게라도 나를 찾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는 너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어. 그 모든 고단함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네가 그토록 외면했던 마음속 빈 공간도 조금씩 채워지니 감사해.
그립고 보고 싶었던 서른 살의 나야.
만나서 반가웠고, 이젠 많이 홀가분해졌어. 계속해서 나는 네가 미처 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근차근히 해보려 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들과도 대화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도 자주 가져볼 게. 네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쓸모없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알게 됐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계속 쓸 거야. 그리움도, 아픔도, 기쁨도 흘려보내지 않고, 단단한 이야기로 만들어 보고 싶어. 지금도 네가 그 식탁 앞에서 느꼈던 공허함이 찾아올 때가 있어. 하지만 이젠 그 감정도 피하지 말고, 들여다볼 거야. 이 모든 성찰이 먼 미래의 나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언젠가 글에서, 삶에서 따스한 기억으로 다시 만나기를.
PS:
그동안 저의 부족한 연재 글『행복한 가드너씨』를 읽어 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힘 덕분에 오래전 기억도 다시 소환하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글이어도 뿌리는 과거이니까요. 두달 여 동안 몰두하느라 자주 힘들고, 가끔 외롭기도 했지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글쓰기와 좀 더 친해진 거 같기도 하고요. 하하. 다른 글에서, 혹은 삶의 아름다운 순간에서 다시 만나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