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항구에 가보고 싶었다. 저릿한 소금 냄새, 갈매기 울음소리, 부둣가의 풍경이 유난히 그리웠다. 찬 바람이 불면 생기는 가을 병이 또 시작된 걸까. 남편에게 바닷바람을 쏘이고 싶다고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날씨도 좋은데, 다녀오지 뭐"하고 바로 콜! 했다. 이심전심 통했나 보다. 우리는 미국에 와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찾았던 곳, 롱아일랜드에 있는 포트 워싱턴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 다다르자, 바닷바람이 살며시 얼굴을 스쳤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물결 위로는 가을 햇살이 반짝이며 흩어졌다. 느끼고 싶었던 바로 그 분위기다. 바닷물이 맑고 푸르른 게,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하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산책길' 팻말을 따라 꽃길로 만들어진 해안선을 걸었다. 바다와 꽃이 함께 보이는 길이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을듯싶었다.
길을 걷는 도중, 곳곳에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판이 보였다. 부모님을 추모하거나,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부한 흔적이었다. 사연은 달라도 꽃과 나무, 그리고 사람을 향한 애정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해졌다. 미국 어딜 가나 보이는 이런 기부 문화 참 좋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공동체를 위해 조용히 기여하는 모습이 새삼 귀하게 와닿았다.
일요일이라 항구 겸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낚시를 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고요히 바다를 바라보는 노부부, 반려견과 산책을 즐기는 이들. 각자의 이유로 이곳을 찾았겠지만, 표정은 한결같이 밝다. 은빛 윤슬이 내 고향 목포항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어져 인사라도 건네는 듯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음이 시원해졌다.
남편과 항구가 보이는 곳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틀랜타에 간 딸과 사위는 잘 살고 있는지. 남편이 쓴 모자가 작아 보인다는 나의 말에 머리통이 커서 그렇다고 했다. 여기에서 파는 것은 다 작다면서. 다음에 한국 가면 하나 사다 줘야겠다. 그러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줌으로 하는 글 모임에서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함께 읽던 중이었다. 관중의 환호가 없어도 끝까지 달리는 꼴찌 주자에게 갈채를 보낸다는 내용. 책에는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꼴찌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글을 읽고 나눔을 하는데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마치 그 길을 외롭게 걷는 사람으로 느껴졌달까.
글을 쓰면서 이런 순간을 자주 만났다. 얼마 전에는 브런치 북을 주 3회 연재하며 하루 종일 글과 씨름했더랬다. 겨우 매주 한 번씩 글을 발행하다가 분량이 많아지면서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미국에서의 25년'을 올해 안에 끝내려던 도전은 무모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미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잘하려 애를 썼었다. 지난주, 연재를 끝나자, 마음이 텅 빈 듯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항구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고독한 노력은 글을 쓸 때뿐이 아니었다. 대부분 중요한 일은 홀로 감당해야 할 때가 많았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아픈 가족을 간호할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은 곳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우리는 고통과 싸우지 않는가.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이루어져 있곤 했다. "땀 흘린 만큼의 수고는 어디로 가진 않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환호받지 않아 더 값진 결과로 느껴지곤 했다.
한참을 남편과 글 이야기와 일상을 주고받았다. 바람은 여전히 짠 내를 품고 있었고, 항구의 배들은 들락날락하며 제 길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그 모든 움직임이 시끄럽지 않고 고요했다. 머물다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면서. 항구가 그러하듯, 내 삶과 글도 멋진 항해를 떠나기도, 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며칠 전 책을 읽으며 울컥했던 박수 없는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힘. 그것이 끝까지 달리는 꼴찌 주자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의 항구는 충분한 위로와 다시 나아갈 힘을 주었다. 바람은 여전히 짠 내를 품고, 나는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