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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깊어진 가을속에서

감사 마일리지 정산서

by 해피가드너

감사 마일리지 정산서

감사 마일리지 정산서

뉴욕의 늦가을이다. 누군가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나는 1초의 거리낌도 없이 '늦가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센트럴파크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 곳곳의 나무들이 물들어 가는 모습은 어딘가 스산하면서도 아름답다. 집 앞 단풍에도 남편과 매일 걷는 공원에도 가을이 푹 내려앉았다. 낙엽의 바스락하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우리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심쿵했다.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느긋한 마음도 느껴졌다. 문득, 늦가을을 사랑하는 이유가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한해를 무사히 보낸 것에 대한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단풍



해마다 추수감사절인 이맘때가 되면 나는 지나온 시간을 정산해 보곤 한다. 그중 하나가 '비행기 마일리지'다. 해마다 한국을 오가다 보니 비행기 마일리지가 많이 쌓였다. 몇 년 전부터는 골드 멤버가 되면서 누리는 혜택은 쏠쏠하다. 탑승 수속부터 수하물을 찾는 일까지 바로바로 처리되고, 공항 라운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하게 쉴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이코노미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연계되는 카드와 같은 항공사를 꾸준히 이용하며 쌓아온 결과물이다.


하지만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마일리지는 따로 있다. 내 영혼의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감사 마일리지'다. 항공 마일리지가 여행을 편안하게 해 주듯 감사 마일리지는 인생의 거친 길을 편안하게 건너게 해주는 힘이 있다. 삶이 주는 서프라이즈 선물 같다고나 할까.


그런 나의 마일리지를 쌓아두는 곳은 매일 아침 마주하는 오래된 책상 위다. 나는 눈을 뜨면 습관처럼 책상에 앉아 감사 일기를 쓴다. 물론 거창한 감사보다 일상의 소소한 감사다. 어떤 날은 가족들이 무탈했고, 어떤 날은 힘들지만 잘 이겨냈다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하소연이다. 그리곤 친구가 15년째 매일 보내주는 성경 구절을 필사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씀을 한 자 한 자 눌러쓰다 보면, 소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하루를 시작할 용기가 생긴다.


매일 아침, 세상이 깨어나기 전 치러내는 감사와 성경 필사의 의식. 그 고요한 몰입을 통해 나는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었다. 마치 영혼의 마일리지를 쌓고 있는 것처럼 든든하게. 그렇게 쌓아둔 마일리지 덕분에 내게 닥친 여러 번의 폭풍을 잠재울 수 있었다.


올해 초, 거센 첫 번째 폭풍이 몰아쳤다. 구순을 넘기신 친정엄마가 낙상 사고로 엉덩이뼈에 금이 가신 것이다. 노인에게 고관절 골절은 생사를 오가는 위중한 일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마는 섬망 증세와 함께 치매 증상까지 보이셨다. 지난 3월에 잠깐 한국을 다녀오긴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계속 이러시다가는 내 얼굴도 못 알아보실 것 같았다. '올 게 왔나 보다' 걱정과 함께 엄마 간호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불안이 밀려올 때면 감사 일기 귀퉁이에 희망을 적었고, 성경 구절을 필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을까. 8개월이 지난 며칠 전, 병원으로부터 기적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아무 이상 없음." 뼈가 놀랍도록 잘 붙었고 뇌 MRI 결과도 괜찮다고 했다. 육체적인 고통이 심하면 섬망증세가 나타나곤 한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무너지는 하늘을 맨손으로 받치는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눈물과 감사로 쌓아둔 마일리지의 선물이라 생각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애틀랜타로 이주한 딸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던 날들에도, 몸과 마음이 아파 웅크리고만 싶던 날들에도, 혹은 모든 일이 술술 풀리던 날들에도. 나를 교만과 비관으로부터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준 건 감사 일기와 성경 필사였다. 딸이 남기고 간 침묵은 기도로 채우고, 텅 빈 마음은 글로 메우면서, 스로를 치유하며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여러 삶의 폭풍이 지나간 후 맞이하는 뉴욕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아름답다. 엄마에게 찾아온 기적, 그리고 글을 쓰며 단단해진 마음. 이것은 매일 아침 책상머리에서 쌓아 올린 '감사 마일리지'로 받은 올해의 가장 귀한 선물이다. 어쩌면 감사란, 가장 힘든 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자, 평범한 날들을 기적으로 바꾸는 '영혼의 적금'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수감사절과 함께 올 한 해의 행복한 정산은 끝났다. 이제 감사 마일리지도 다시 시작이다. 뉴욕의 깊어진 가을 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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